'달집- 백성희論' (발췌) |
김윤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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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집>- ‘백성희論’ 중에서
(김윤철, 연극평론가 연극원 교수)
(전략) --(연극배우 백성희는) <나도 인간이 되련다>에서 절정의 연기를 선보였던 백성희는 1962년 <산불>(차범석 작, 이진순 연출)을 시작으로 1964년 <만선>(천승세 작, 최현민 연출), 1971년 <달집>(노경식 작, 임영웅 연출), 1979년 <무녀도>(김동리 원작, 하유상 각색, 허규 연출) 등 국립극단 창작레퍼토리를 대표하는 굵직굵직한 공연에서도 주역을 맡으며 한국을 대표하는 여배우로 자리매김 된다. --
전라도의 토속적 방언과 생생하고 사실적인 대사, 그리고 한 어머니의 처절한 삶이 작품의 맥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달집>의 성간난 노파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주인공 성간난 노파는 일제시대 때 남편을 잃고 자신은 헌병에게 가슴을 헤쳐보이는 치욕을 당한다. 큰아들은 징용에 끌려가 죽었고, 큰며느리는 다른 사내와 눈이 맞아 달아난다. 노름 끝에 만주로 달아났던 둘째 아들 창보가 해방 후 귀국하면서 데리고 온 둘째며느리는 돌아오는 길에 로스케에게 추행당하고 그 사실을 안 성간난 노파의 학대를 이기지 못하고 음독자살한다. 병원에 있던 큰손자는 실명한 채 돌아오고, 작은손자는 이웃 마을을 습격하다 피살된다. 빨치산에 잡혀간 큰손자며느리는 그들에게 겁간당하고 돌아와서 목매달아 죽는다. 한 여인에게 이렇게 철저한 비극이 일어날 수 있을까 의심될 정도로 성간난 노파의 삶은 처절하다. 1971년 국립극단 공연에서 성간난 노파를 연기한 백성희는 우리 수난의 역사를 한 몸에 간직하고 있는 어머니의 삶을 형상화하기 위해 하루 평균 6시간의 맹연습을 소화하고, 자신의 모든 대사를 녹음하여 검토하는 지독함으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러한 의지와 노력의 결과로 <달집>은 평단의 주목을 끌었고, 공연에 대한 관심은 자연 성간난 노파를 연기한 백성희한테로 이어졌다. 몇 가지 대표적인 반응을 살피자면, 먼저 이상일은 간난 노파를 체현한 백성희의 연기가 “전반부에 비하여 극이 고조됨에 따라 더욱 연기를 가다듬는 의지의 화신이었”으며 마치 “역사에 도전하는 거인의 의지” 같았다며 그의 힘 있고 창조적인 연기를 높이 평가했다. 아울러 “백성희는 성간난 노파의 이야기를 체험할 수 있는 이해의 영역 안에 있었으나 여타의 연기자들은 그 작중인물의 세계와 동떨어진 체험의 세계에 살고 있어서 그 체현이 감정과 의식에서 분리되어 있었다.”는 일침도 가한다. 구히서는 이야기의 무리 없는 전개와 등장인물들의 성공적인 성격창조, 그 중에서도 특히 성간난 노파의 성격창조의 성공 등이 이 작품에 박수를 칠만한 요소라고 전제한 뒤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잊고 싶고, 외면하고 싶을 정도로 구질구질한 옛 기억들이 깔린 한 가정의 비극을 좋은 연극으로 창조해낸 것은 성간난 노파에게 소박하지만 타협할 줄 모르는 인생관과 도덕관을 갖도록 한 점과 수선스러울 정도로 장중하게 내뱉는 리드미컬한 대사를 구사한 점이다. … 백성희는 기를 쓰고 살아가는 성간난 노파의 성격에 어울리는 세찬 정열로 역을 소화해서 정열적인 연기를 보여주었다. … 사실적인 무대장치, 상당히 세밀한 조명 등이 이야기 전개의 순조로운 바탕이 되고 있다.
이상일의 지적처럼 “거인의 의지”와 같은 정열로 성간난 노파를 창조한 백성희의 연기에 주목하면서 동시에 정확하고 리드미컬한 대사 구사를 칭찬한다. 배우가 아무리 격정과 흥분에 들떠 있다하더라도 무대 위에서는 일말의 허튼 발성과 대사도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 이러한 철저함과 엄격성을 지켜나가는 것이 바로 ‘백성희 표 연기’다. 한편 한상철은 연극계가 오랜만에 훌륭한 전통 리얼리즘연극 한편을 얻었다고 기뻐하면서 노경식이라는 신예극작가의 등장과 이를 더욱 빛나게 해준 것으로 백성희의 연기를 언급한다. 또한 “본능적이라 할 만큼 흙에 집착해 살면서 우매하리만큼 자기 고집을 내세우며 끈질기게 살아온 이 노파야말로 한국 사회에 면면히 흘러내려온 전형적인 토착적 인간상으로서, 바로 이러한 전형적인 인간상을 부각시켜 놓는 데 성공한 <달집>은 사실주의 내지 자연주의적 한국 신극 전통의 하나를 매듭짓는 것으로 기억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며 작품과 공연의 의의를 평가한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1960년 이후 백성희 연기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어머니 역의 전형 창조’를 꼽을 수 있다. 1962년 <산불> 공연을 통해 전라도 산악지대에서 무지랭이로 살아가는 과부로 변신한 이후, <만선>에서는 어촌 아낙의 억척스런 삶과 비극적 인생을 곱고 여리고 섬세하게 표현함으로써 ‘상식을 비껴가는’ 어머니를 창조했다. <달집>에서는 우리 현대사의 비극을 온 몸으로 떠안고 살아가는 한 노파의 처절한 삶을 굵고 힘 있게 성격화하여 역사적이면서도 가장 사실적인 인물로서의 어머니를 형상화했다. 연극평론가 유민영은 백성희를 가리켜 하회가면의 ‘부네’에 비유한 적이 있다. 아담하고 단아하며 균형 잡힌 몸매가 관객들에게 친근감을 주는가하면, 지적인 중년아내의 이미지와 모든 고통을 내면화시킨 한국의 어머니 상을 무대 위에서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 신파극이나 대중극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감상적이며 현실순응적인 어머니 상과는 인식의 층이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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