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자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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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자의 눈으로 본 노경식에 관한 글들입니다.
 
 
 
술과 인생- '友夢傘 酒遊記' 유민영
 
술을 좋아하는 것은 우리집안의 내력인 것 같다. 조부께서는 요절을 하셨기 때문에 잘 모르지만 선친은 말할 것도 없고 집안의 대소사에 모인 어른들은 며칠씩 밤늦도록 주연을 베푸는 것을 보면서 자란 것이 바로 나다. 우리집 아랫목에는 언제나 술독이 있었고, 유년시절 나 역시 술지게미를 먹고 취해서 잠든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내 또래 시골출신들은 대부분 술 잘하고 수영도 못하는 사람이 없다.
왜냐하면 술지게미를 밥 대신 먹고, 앞개울이나 웅덩이에서 개헤엄부터 배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주변에는 술꾼들이 많고 밥은 한끼 건너도 술은 못 건너는 주선(酒仙)들이 늘어서 있다. 대학시절까지는 주로 막걸리를 마셨지만 사회에 나와서는 소주만 마시게 되었다. 소주는 처음에 시작하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일단 맛을 들여놓으면 다른 술은 잘 마시게 되지 않는다. 물론 술꾼들은 청탁불문이지만 소주만 고집하는 사람도 꽤 있다.
소주만 1만병을 돌파해서 진로회사로부터 어느 날 소주 두 박스를 선물 받았다고 자랑하는 중진 미술평론가 유준상(서울시립미술관장)이라든가 하루에 소주 1병 이상 마시지 않으면 설사를 한다는 영문학자 전형기(한양대 교수) 등도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이다. 나 역시 소주파여서 이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발렌타인30」도 제쳐놓고 소주만 마신다.
한창 책을 쓸 때는 불면증까지 생겨서 소주 1병을 마시지 않으면 잠을 자지 못했다. 따라서 허풍이 세기로 이름난 중진 연극평론가 이태주(서울시립극단장)는 내가 큰 책을 내었을 때, 한 서평에서 ‘소주 한 트럭을 마시고 쓴 역시’라고 과찬하기도 했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직장에서도 나오게 되고 이제는 직장동료보다는 각 분야에서 죽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우리들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죽이 맞는 연극인들끼리 만나는 모임을 만들었다. 이름하여 「우몽산」인데 당초의 이름은 「주몽산(酒夢傘)」이었다. 물론 모임의 명칭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998년초 여름에 술을 좋아하는 연극인 다섯 명이 대학로에서 소주잔을 기울이게 되었다. 평소 연극인들의 존경을 받는 원로극작가 차범석 선생(예술원회장)을 중심으로 백성희(국립극단 원로배우), 노경식(극작가), 윤대성(서울예대 교수), 유용환(연극기획자) 등이 질펀하게 소주를 마신 것이다. 그때 누군가 한 명이 아예 매월 마지막 주 금요일에 만나서 정례적으로 소주파티를 벌이자고 제의했다. 거기에 싫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려면 회원을 조금 더 늘리는 것이 괜찮겠다는 의견이 나왔고 단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면 가입이 불가능한 언약도 했다. 그래서 일차로 영입된 술꾼이 다름 아닌 중진연출가 권오일(극단 성좌대표)과 중견탤런트 남일우였다. 이어서 두 번째로 중진연출가 임영웅(산울림 대표)과 이태주, 그리고 필자였다.
그런데 여성이 백성희 선생 한 분이어서 한 명쯤 더 영입하자는 의견이 분분했는데, 한두 명이 테스트 과정에서 탈락했다. 회원들 모두가 취향이 다른데다가 여자를 보는 안목이 높아서 웬만한 여성은 근처에도 오지 못했다. 회원이 열 명으로 굳어지자 명칭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아이디어 많은 이태주 회원이 ‘한데 모여 술 마시며 꿈꾸자, 이 세상 한바탕 얼마나 덧없는 것인가’라는 의미로서 「주몽산」이라 지어온 것이다. 처음에는 모두 그 이름에 환호작약했다. 그러나 흥분이 가라앉은 뒤 차범석 회장은 그 명칭이 너무 진한 것 같다는 의견을 제시했고 결국 주(酒)대신에 친구란 뜻의 우(友)로 바꾸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당초 열 명 모두가 소주파는 아니었다. 나중에 가입한 열 많은 이태주와 임영웅은 맥주와 양주를 주로 마셨었다. 그러나 우몽산에 일단 가입해서는 소주로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소주도 오프너로 뚜껑을 열어야 하는 진로(眞露)만 마셨다.

참이슬이 나온 다음에도 병뚜껑의 진로만 고집하는 회원이 있어서 골치가 아프기도 했다. 회비는 모일 적마다 3만원씩 내게 되어있는데, 계산하고 나머지는 모았다가 산수 좋은 곳으로 야유회도 다니곤 한다. 강원도 속초에 가서 바닷바람도 쏘이고 강화도에 가서 밴댕이회도 먹고 왔다. 가장 멀리 간 것은 땅끝마을이었다.
연전 차범석 회장이 목포 대불대학에서 명예박사를 받을 때 회원들이 축하한다고 내려갔지만 축하는 잠시고 해변가에서 소주 퍼마시기에 여념이 없었다. 회원 열 명중 누가 더 세고 덜하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소주 몇 병씩은 간단히 해치우는 수준이지만 단 한사람도 주사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그저 웃음이 넘친다. 가급적 정치이야기 안하고 남 험담 안 하는 것도 우리 모임의 불문율이 아닐까 싶다. 따라서 다툼도 없고 즐겁기만 하다. 이런 것은 아무래도 격의 없이 후배들을 보듬고 사랑하는 선비형 예술가 차범석 선생과 백성희 여사가 있고 또 이분들이 희수를 넘겼으면서도 약주를 할 수 있는 건강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라 본다. 이분들이 내내 건강해서 우리 후배들이 희수를 넘길 때까지 우몽산 모임을 지속할 수 있었으면 더 없이 좋겠다.
(유민영- '참이슬' 2002.05~06에서)
* 사진: "겨울바다를 찾아서" (속초, 199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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