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착적 생명력과 탁월한 대사... |
여석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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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 리 말’ (노경식희곡집 제1권)
토착적 생명력과 탁월한 대사감각
극작가 노경식씨를 알게 된 시초는 그가 희곡을 쓰기 시작한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이 작품집 첫머리에 실린 단막극 <철새>가 신문사 신춘문예에 당선될 즈음에 남산 드라마센타에서 “劇作워크숍”이 시작되었고, 우리는 거기서 만나게 된 것이다. 이 워크숍은 당시에 새로운 시도였다. 희곡을 쓰기 시작한 사람, 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주로 해서 각자 자기가 쓴 희곡(대체로 단막극)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난상토론을 벌이는데, 가차없는 난도질을 당하고 난 다음 몇 번이고 고쳐써서 ‘통과’가 되면 다행이고, 아무리 열심히 고쳐도 ‘퇴출’당하는 일이 훨씬 더 많았다. 그런 과정을 거치다 보면 희곡을 쓰는 공부도 되려니와, 그보다 더하게 극작가로서 살아남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 워크숍을 작품이라고는 한 줄도 쓴 적이 없는 내가 주재자 노릇을 했으니 생각하면 주제넘은 짓이었으나,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의 그 모임은 무척 큰 소득이 있었다. 왠고하니 그후 오랫동안 우리 연극계의 일선에서 활발하게 뛴 극작가 대부분이 어떤 형태로든지 이 “劇作워크숍”과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노경식씨는 바로 그 대열의 선두에 섰던 한 사람이다. 그는 단순히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많은 극작가 지망생들이 ‘죽어갔다’), 1971년에 발표한 첫 장막극 <달집>으로 우리 연극계에 화려한 선을 보였으며, 잇따라서 중후한 작품들을 생산하게 되었던 것이다. <달집>은 70년대 초에 내가 그와 맺은 또 하나의 계기를 제공해 주었다. 이 작품의 원고를 읽는 私的인 기회에(그때는 이미 워크숍을 ‘졸업’한 뒤이다), 나는 南原 시골 출신의 이 극작가의 강인한 토착적 생명력과 탁월한 대사 감각을 새롭게 느낄 수 있었다. “달집”이라는 타이틀도 그의 몇가지 선택 중에서 이 작품의 이미지를 가장 잘 살리는 것이라고 조언했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이 장막희곡은 그때 내가 발행하기 시작했던 잡지 <연극평론>에 실리게 되었고, 원고료 한 푼 주지도 않고서 잡지는 빛을 얻게끔 되었다. 해서 내친 김에 그의 작품을 두어 편 더 싣게 되었고, 더욱 내친 김에 나는 <연극평론>의 모든 잡지 교정과 인쇄소 교섭까지도 그에게 내맡겨 버렸던 것이다. 이런 후안무치한 부탁을 그는 한번도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으니 아마도 전생의 인연인가 보다 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래저래 나는 작가 노경식씨와의 그 숱한 개인적 연고를 말하지 않고서는 이 ‘머리말’을 쓸 수 없다는 생각이다. 그가 어떤 자질의 극작가이며 그의 작품이 어떤 특성과 경향을 지니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또 한 분 그와 뗄래야 뗄 수 없는 인연을 가진 연극인인 평론가 한상철 교수가 쓴다고 하니까, 나의 賀詞는 이쯤으로 그치는 것이 좋을 듯싶다. 일찍 나왔어야 할 노경식 작품집이 다섯 권의 부피를 갖게 되었으니 오히려 그 무게와 값어치를 더한 것 같아 기쁘고, 앞으로도 계속 좋은 희곡을 쓸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에 여기서 한숨 돌리는 것도 큰 의미가 있으리라고 믿는 바이다. 그간 하도 많은 빚을 진 사람으로서 이 하찮은 글이나마 조금은 ‘빚 갚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노형, 앞으로도 당신님에게 걸맞은 묵직한 작품을 많이 써 주십시오!
갑신 (2004년) 새봄에
여 석 기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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