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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자의 눈으로 본 노경식에 관한 글들입니다.
 
 
 
고향친구 '하정당'을 말한다 한보영
 
뒷풀이글 2 - 고향친구 ‘下井堂’을 말한다

‘그에게 남모르는 외로움이 있었다’

한 보 영 (언론인, 전 「MBC권투」해설위원)

“노경식이 극작가가 된 동기는 별로 이렇다할 만한 것이 없다.”
일찍이 연극평론가 한상철 교수(작고, 2009)가 발표한 장문의 논문 「노경식論- 時代狀況과 민중적 삶의 관계추적」에서 읽은 한 구절이다. 나의 친구 본인 스스로도 그렇게 털어놓은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극작가 노경식은 과연 그런가! 가볍게 그냥 넘어갈까도 생각했으나, 나도 모르게 그 글귀에 약간의 ‘반발심’(?)이 일어나는 것을 어찌할 수 없구나. 나 한보영은 그만큼 같은 골목에서, 꿈 많고 겁 없는 소년시절을 함께 보낸 불알친구로서 ‘下井堂’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우리들이 개구쟁이 시절을 정답게 보낸 그 골목길은 남원 읍내의 하정리(지금의 南原市 下井洞)라는 동네에 있었다. 본인도 얘기했지만 그 당시는 읍내 한가운데의 중심핵에 위치한 동네랄 수 있는 지역이다. 그 골목에서 큰 길로 나와 서쪽으로 조금 걸어가면 제일 번화한 은행 네거리가 있었고, 또 조금 못 미친 곳에 자리잡고 있는 이 고장의 유일무이한 ‘남원극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나 같은 조숙 불량소년이나 배회할 극장 주위를, 얌전하기만 한 어린 하정당도 내심 그 쪽에 관심을 갖고 배회했으리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던 일.
하지만 그는 주위의 그런저런 환경이, 막연하나마 극에 대한 관심, 문예적 소양을 살찌게 한 것으로 회상하고 있다. 초등학교 5, 6학년 때 참여한 학예회(연극)도 그에게 적잖은 영향을 줬으리라고 본인 자신이 그렇게 술회하고 있다.
물론 틀린 생각은 아니다. 하지만 下井堂이 극작가 되기 위한 꿈은 그렇듯이 ‘막연하지 않았다’는 게 나 어깨동무 친구의 기억이다. 아니, 이 불알친구의 추억 속에는 오롯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 추억을 구체화하려면 하정리의 그 골목시절로 되돌아가야 한다. ‘하정골목’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또 한 사람의 불알친구가 등장해야 한다. 그자의 이름은 이상경(李相坰). 키도 작고 새까맣고 볼품없는 이 친구라니. 그러나 우리 셋 중에선 여러 가지로 재주와 재기가 발랄한 소꿉친구임이 분명하다. 그는 그림솜씨도 남달랐다. 6. 25 한국전쟁의 참화와 궁핍과 혼란의 그 시절, 동네 병정놀이에 필요한 ‘계급장’, 학급 반의 축구선수에 필요한 ‘심벌마크’나 ‘백넘버’ 등을 그가 도맡아 도안 제작해줄 정도로 말이다. 뿐만 아니라 이상경은 글 쓰는 재간도 역시 뛰어났다. 우리가 4학년 때, 그러니까 우리끼리 패거리를 만들어서 “연극”을 한답시고 설쳐댈 때 그 대본을 쓴 작자도 다름 아닌 그 꼬마친구였으니, 장차 커서 작가가 되자면 노경식이나 한보영이 아닌, ‘이상경이다’ 하는 기대를 갖게 할 수 있는 재간 덩어리였다. 허나 ‘옥불탁(玉不琢)이면 불성기’(不成器)란 말(형산의 옥돌도 쪼고 다듬지 않으면 그릇이 못된다는 뜻)이 있듯이 그는 다른 길로 가버리고 말았다. --
이 “하정골목 트리오” 셋은 같은 학교(남원용성국민학교)에 학년도 학급도 똑같았다. 그러니 학교에서나 하학 후 동네에서나 밤낮 없이 얼굴을 맞대고 함께 생활할 수밖에. 나와 이상경의 집은 바로 한 골목의 맞은 편에 대문을 사이에 두고 있었고, 노경식은 내 집 뒤쪽의 흙담장 하나를 사이에 둔 지척에서 살았다.
어렸을 적 노경식은 한마디로 미소년이었다. 키도 컸고 공부도 잘 했을 뿐 아니라 얌전하고 말수도 적은 편이었다. 이상경도 영리하고 활발했으며, 학교 공부는 둘 다 상위권. 그런데 이상경은 거친 편은 아니었지만 ‘깡’은 알아줬다. 누구와 잘 싸우지 않는 반면 한번 붙었다 하면 물고 늘어지는 기질. 그 무렵 나는 3년을 꿇어서 그들과 같은 학년이 돼 있었다. 왜냐면 일제의 태평양전쟁 말엽, 부모를 따라 지리산으로 ‘疏開’나갔다가 Come Back Home한 게 3년 뒤였으니 학교를 그만두고 떠날 때의 2학년에 다시금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3학년의 나이 차이. 그것은 단순히 나잇살 차이만은 아니었고, 생각하는 것과 하는 짓거리가 어른스럽다고 할까, 완력도 세고 키도 크고 거기다 씨름이다, 축구시합이다 해서 스포츠 만능이었으니 그 또래들 중에서 나는 단연 압도적이고, 소위 리더십까지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늘 또래의 앞장에 서있었다. 4학년 때(6.25 2년 전), 우리는 그때 한창 유행했던 악극단 연극에 심취한 나머지 우리도 악극단에서 흔히 다루는 활극(독립운동)을 소재로 한 무대를 꾸몄다. 제목은 생각나지 않지만 극본은 물론 이상경이 썼고, 내가 주연 겸 감독을 맡았으며, 내성적인 미소년 노경식은 치마 저고리의 예쁜 여장을 하고 “어머니” 역으로 출연하였다. 그게 빌미가 돼서 5학년 때는 전교 학예회에 ‘연극반’으로 뽑혔는데, 아직도 나를 선후배 동문들은 ‘개미대장’이라고 기억하는 것도 바로 그때의 학예회가 떠올랐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렇다. 겉으로 드러난 사실로 보아, 노경식이 극작가가 된 ‘뚜렷한 동기’를 찾기란 그렇게 쉽지 않을 것이다. 그와 더불어 순수한 개구쟁이의 한때를 보낸 나조차도, 노경식이가 서울신문 신춘문예(1965)에서 희곡 <철새>가 당선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적이 고개를 갸웃한 적이 있다. 더구나 대학에서 그의 전공 학과는 경제학 아닌가. 당시만 해도 춥고 배고픔의 표상이랄 ‘희곡작가’를 꿈꾸고 있으리라곤 전혀 생각 밖이었다.
하지만 나는 곧 머리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애, 노경식한테는 남모르는 ‘외로움과 공허’가 있었다. 11살 때 그는 아버지를 여의였다. 누이 같은 피붙이 하나도 없이 외톨이 2대 독자로 태어나서 할머니와 어머니, 두 과수의 손에 별 탈 없이 귀엽고 곱게 자라났으나, 뭔가 그의 삶과 인생에는 채우지 못한 공허 같은 게 있을 법했다. 겉으로는 평탄하게 성장해 왔고 내색은 하지 않았으나 ‘하정골목’에서 키운 어릴 적 꿈과 연극적 분위기가 그로 하여금 심중에 예술적 욕망과 온축으로 자라나고 갈고 닦이고 있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키 어렵지 않았다. 바로 하정당 노경식의 그 외로움과 공허가 어느 정도였을지 가늠하기에 충분하다 할 것이다.
내 생각하기에 만일 우리의 노경식이가 얌전하고 내성적(?) 성정이 아니었다면 극작가가 아닌 ‘연기자의 길’을 선택했을지 모른다. 그만큼 그는 해맑고 깨끗한 외모를 지녔다. 그러나 순박한 그는 겉보기와 달리 양지보다 음지, ‘앞’보다 ‘뒤’에서 상상의 나래를 펴옴직하다. 화려하고 외향적인 배우의 길보다는 차라리 ‘내공’을 길들이는 희곡문학에 더욱 많은 매력을 느꼈음이 분명하다. 그 모든 게 “남모르는 외로움과 공허” 때문이 아니었을까.
무의식도 의식이다. 하정당이 극작가가 된 숨은 뜻과 동기는 그랬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맡은 ‘女役’(어머니)이 그 빌미요 동기라면 동기라 하겠다. 그로부터 노경식은 연극예술과 문학에 대한 꿈이 잉태되었고, 외로움과 공허를 그 꿈으로 메우려는 열정에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동기구현이 이뤄진 셈이다. 이와 같이 ‘심중하고 근원적 동기’가 무의식 속에 갇혀있으니 다른 이에겐 족집게처럼 잡혀질 리 만무하잖은가?
우리네 “하정골목 트리오”가 깨진 것은 내가 6학년 때 용성중학에 월반 편입, 그들의 1년 선배가 되고나서의 일이다. 나는 중학교에 들어가자 곧 배구선수로 뽑혔고, 운동선수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이들과 소원해졌다. 그러나 나 역시 하정골목에서 키운 문학적 선망과 야망을 한동안은 버리지 못했었다. 그리하여 아예 몇몇 선배님들과 어울리며 시와 소설을, 당시 문학과 사상계의 세계적 흐름이었던 ‘실존주의 토론’에 귀를 기울였던 때가 지금도 눈과 기억에 선하다. 문학 동인지를 두 번이나 출간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나의 인생행로, 즉 활동무대는 문학예술이 아닌 스포츠계. 그러니까 하정골목의 우리네 어릴 적 꿈과 소망은 결국 노경식이라는 나무에서 개화되고 만개한 셈이다. 때문인가. 극작가 노경식은 하장골목에 대한 향수가 남다른 듯싶다. 그러기에 그는 평생 모은 장서를 고향 남원시에 기증하여 「남원시립도서관」창설의 기틀을 마련하고, 아호를 아예 ‘下井堂’이라고 명명하지 않았겠는가.
뒤늦게나마 나 한보영이는 “하정골목 트리오”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곧고 끈질긴 ‘한길 가기’에 힘찬 박수를 보내고, 아울러 『노경식희곡집』(전5권) 출간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싶다. 이왕이면 「축 출간」의 자리를 우리 고향 남원의 ‘하정골목’에서 축하주와 더불어 童心에 흠뻑 젖어보는 것도 如何하올지 ---- (2009.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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