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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식의 근황과 소견 및 일상소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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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추억]- 나의 古物 하나
[추 억]

나의 古物 하나

‘ -- 나의 고물 하나. 단기 4289는 1956년으로, 반백 년을 훨씬 넘어섰다. 참혹한 6.25전쟁 끝나고 불과 3년 지난 궁핍과 절망의 시절에 받은 영예의 “全羅北道知事 賞” 시계. 비록 녹 슬고 낡은 사발시계지만 그래도 독일제 ’MADE IN GERMANY’ 글자가 확연하네요. 고교시절 남원 촌놈이 도지사상까지 받았으니까 그런대로 공부와 善行은 괜찮았던 모야이죠? ㅎ ㅎ ㅎ’
얼마 전에 재미삼아 사진 한 장을 곁들여서 facebook과 twitter에 띄운 글. 그랬는데 연극인 페친이 30명 가까이 ‘좋아요’를 찍고 댓글도 몇 개 달아줬다.

지난 날을 추억해 보니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일이고, 아마도 그 이듬해 봄의 고교졸업 시즌을 앞둔 그 언저리 아닌가 한다. 그러니까 1956년 그해 늦가을의 어느 날, 담임선생(魯相寅 은사)께서 교무실로 나를 부르셨다. 선생님은 목소리가 나지막하고 평소의 조용한 음성으로 도란도란 다정하게,

“야, 겡(경)식아. 전주에 있는 도(道)교육청에서 연락 왔는디, 겡식이 니가 ‘도지사상’을 받는다고 말여 --”
“도지사상이요? 고것이 뭣인디.”
“우리 전라북도 지사님이 주는 것인깨 학교의 명예와 영광 아니것냐! 허허.”
“왜요?”
“낼모레 토요일 오후참에 가정방문이 있을텐깨, 느그 할무니한테 고렇게 말씀 일르거라, 잉.”

그 시절에 학교 담임선생의 ‘가정방문’은 새로 시작되는 매년 봄의 학기 초마다 일상적으로 실시하는 하나의 관행 제도였다. 6.25 전후의 누구나 없이 어느 집이든지 가난하고 어렵고 힘들었던 그 시절, 학생의 경제적인 가정형편과 가족관계 등을 알아봐서 학교교육과 생활지도에 참고 보탬이 되도록하자는 취지의 스승님들의 善行. 아침의 등교시에 집에서 ‘벤또’(도시락)를 싸올 수 없는 학생은 점심 시간 때만 되면 슬그머니 뒤로 빠져서, 운동장 한켠의 수돗가에 가갖고는 수도꼭지에다 입을 대고 찬물로 배를 채웠다는 이야기는 비일비재 흔한 일 아니던가. --

어쨌거나 학교 선생님의 가정방문이라는 말에 우리 집은 잠시 부산을 떨지 않을 수 없었다. 집안 형편은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었으니까, ‘귀인접대’에 열과 성을 다하자는 것. 할머니께서는 작은할아버지 --할아버지 3형제 중 셋째, 홀애비 몸으로 우리 집에 의탁하고 여생을 보냈다 &#8212;를 시켜 닭장에 들어가서 제일 실팍한 장닭 한 마리의 모가지를 비틀게 하고, 당신은 뒤안(란) 텃밭에 가서 싱싱한 새 배추와 무를 뽑고 호박 고추를 따다가 부치개 전을 부쳐내고, 어머니는 정지(부엌)에서 물을 끓이는 삭정이불을 지피고, 나는 큰 양은 주전자(세 되 들이)를 챙겨들고 쏜살같이 술도가(양조장)로 뛰어갔다. 귀한 손님 접대에 술이 없어서는 될 말인가. 그것도 텁텁한 막걸리는 제쳐두고, 값 비싸고 맛 좋은 맑은 술 ‘약주’(淸酒)로 말이다.
그랬는데 담임선생은 당신 말고도 두 분 선생님을 더 데리고 셋이서 방문하신 것이다. 하기사 단독으로 혼자 와서 무슨 맛이람. 그리하여 3인 선생들은 긴 마루에 둘러앉아서 주안상을 앞에 놓고, 서로서로 권커니잣커니 웃고 큰소리로 떠들고 흥취가 도도하였다. 물론 할머니는 인사차로 술 한 잔을 받아마시고는 자리를 피해주시고, 나는 멀찌감치 저만큼 마루 끝에 마치 벌(罰)이라도 받는 놈처럼 쭈그리고 앉아서 술상 파하기를 마냥 기다리는 것이었다. 아니, 저러다가는 저녁밥까지 다 ‘묵고’ 가시는 것 아닐까? --

그날 담임 노(魯) 선생께서 가져온 것은 금빛 문양이 들어있는 큼직한 <도지시상> 상장과 부상으로 독일제의 이 <사발시계>였다. 상장은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있었는데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내버릴 리는 없고 어디엔가 꼬깃꼬깃 숨겨져 있겠지. 오늘에사 보면 붉은 칠을 한 양철때기 케이스에 태엽으로 감아서 작동하는 가벼운 물건이지만, 그래도 ‘찰칵찰칵’ 초침(秒針) 바늘과, ‘따르릉~ 따르릉~’ 울리는 알람까지 있어서 다목적적이고 최신식 아니던가. 참으로 생광스럽고 귀하고 고마운 ‘시계 선물’이었다. 하여, 낡고 고장난 헌 물건이나마 내 나름대로 지금껏 귀중하게 잘 간직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런 훌륭한 상이 ‘촌놈’ 나에게까지 왜 왔을까? 그 시절은 학교마다 두 개의 큰 조직활동이 있었다. 그 하나는 목총(木銃) 메고 군사훈련하는 ‘학도호국단’ (대대장 고만규)이
1957년 남원농고 졸업기념. 어머니를 모시고. (뒷줄 바른쪽에서 고만규, 나)
장한 뜻을 품고 길을 나선다는 ‘壯途’의 한문 글씨가 추억을 새롭게 한다
있었고, 전교생의 민주주의를 위한 자치(自治)훈련 격인 ‘학생운영위원회’ 제도이다. 1년에 한번씩 학교의 전학년이 강당에 모여서 직접투표로 뽑는데, 대개 최고 학년의 3학년생이 그 대표가 된다. 그래서 그해 3학년 때는 노경식이가 ‘운영위원장’으로서 버젓이 활동하고 있었던 것.
그날에 선생님께서 은근하게 나직이 하시던 말씀.
“겡식이 넌 운이 좋아, 야. 전라북도에 고등학교가 몇이냐? 그 많은 학교를 모조리 죄다 줄 수는 &#50742;고, 해마다 돌아가면서 몇 학교씩 뽑아서 상을 준단다. 요번에 그런깨로 겡식이 니놈 행운이 좋은 셈이제! 허 허 --”

페이스북에 올라온 댓글 한 개를 소개하고 끝을 맺는다.
‘이경희(배우) : 선생님, 이뻐요 ~~ 모냥이. 독일제는 믿을만해요. 튼튼 --. 으음, 그때부터 상을 휩쓰셨군요! -- ’ (2013-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