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대사 - 千古에 홀로 왔다 ... |
순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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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당 유적지 순례기)
千古에 홀로 왔다 홀로 가신 어른 - 출가도량 直指寺 -
노경식 (사명당기념사업회 이사)
우리 순례단 일행이 합천 해인사의 홍제암을 출발해서 멀리 추풍령이 바라다보이는 황악산 직지사에 도착한 것은 대략 열두 시경 정오 때였다. 우리는 지금 88고속도로를 달리다가 경부고속도로로 들어서고, 그리하여 김천IC에서 빠져나와 4번국도를 타고 추풍령 쪽으로 달린 끝에, 그러니까 오전 10시경에 홍제암을 출발한 지 두 시간 남짓 걸려서 마침내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우리 순례단의 2박 3일(2001년 8월 11일~13일) 일정 중에서 경북 김천에 자리잡고 있는 직지사 탐방을 맨 마지막 날의 코스로 넣은 것은 아무래도 우리 일행이 서울에 돌아가기 위한 귀경 길을 고려하였음이렷다.
그에 앞서 우리들은 첫째 날에 사명대사의 탄생지인 밀양의 표충비각과 생가터 및 표충사를 차례로 순례하고 나서 저녁식사는 밀양시장 이상조님의 따뜻하고 융슝한 대접으로 반주까지 곁들여서 즐겁게 회식한 연후에 부곡온천에서 하룻밤을 청했던 것이다. 그리고 둘째 날은 양산 통도사를 다녀와서 해인사 홍제암에 밤늦게 닿았었다. 잘 알다시피 해인사 홍제암이라면 사명 큰스님께서 세속 나이 67세로서 그 파란만장하며 장대한 일생을 마감하고 길이 열반에 드셨던 유서 깊은 곳이 아닌가! 나는 개인적으로 남다른 감회와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절 안 요사채에서 일행과 함께 공동투숙으로 그날 밤을 묵었다. 도대체 나처럼 세속에 찌들고 머리통은 미련하고 아는 것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놈이 감히 사명 큰스님의 위대한 일생을 그리겠노라고, 그동안에 라디오 드라마로 극화를 하고 실록소설로써 써댔으니 언감생생심 이런 무엄하고 그 죄만스럽고 부끄럽고 욕됨이 얼마일까. 행여 오늘밤 꿈 속에서라도 큰스님이 나타나서 죽비를 높이 치켜들고 내 양어깨를 후려치지나 않으실까 두려움이 먼저 앞서는 밤이었다. 그러나 산사의 밤은 고즈넉이 깊어만 가고 사위는 쥐 죽은 듯이 고요하며, 바람소리 풍경소리 나뭇잎 하나 흔들리는 소리도 없이 정밀과 안정과 평화의 그 자체였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 -- 그 셋째 날 우리들 일행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찬물에 소세하고 공양을 마친 뒤에 홍제암의 원주 종성스님의 친절하고 은근한 인도를 받아서 사명 큰스님의 진영에 예배하고, 그러고는 석장비와 부도탑 및 조금 떨어져 있는 백용성(白龍城) 선사님의 기념비, 해인사의 본당 대적광전과 장경각 등을 경건한 마음으로 순례할 수가 있었다. 원주 종성스님은 어디까지나 순하고 소탈한 모습으로 구수한 입답과 유머 감각이 뛰어나서 간혹 우리의 웃음을 자아내게 만들었고, 또한 인정미가 물씬 풍겨나는 평범하고 사람 좋은 촌부의 인상이었다. 그것이 곧 도를 깨우친 평상심이요 보살사상의 체현이 아닐까 하고 나 혼자서만 넌지시 생각하며 푸른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리하여 우리 일행은 원주 스님과 다른 두 젊은 스님들의 따뜻한 전별을 받으며 해인사를 뒤로하고 김천 직지사 절에 당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황악산 직지사는 10대의 어린 사명이 머리 깎고 불문에 들게 되는 출가도량으로 서 인연이 깊고 더욱 유명한 곳이다. 그때에 절에는 신묵화상이라는 고승 한 분이 있었는데 스님께서 공양을 마치고 비몽사몽간에 얼핏 풋잠이 들었다. 그런데 꿈에 나타나기를 절의 일주문 밖에 있는 큰 은행나무 가지에 누런 황룡 한 마리가 서리어 있다가 꿈틀거리면서 하늘로 향하더라는 것이었다. 스님은 불현듯 눈을 뜨고 일어나서 꿈이 요상타 생각하며 바람바람 일주문 밖으로 내려가 보았다. 그러자 때마침 허름하고 땟국이 흐르는 두루마기 차림에 헌 갓을 눌러쓴 노친네 한 분이 열 살 남짓한 소년의 손목을 잡고 절을 향해서 터덕터덕 올라오고 있더라는 것. 해서 신묵화상은 그 할아버지의 청을 받아들이고 어린 소년의 머리를 손수 깎아 시자승으로 삼았으니 이가 곧 훗날의 사명당 큰스님이시다.
키가 짝달막하고 둥근 얼굴에 한복으로 단정하게 받쳐입은 이양길 법사(직지사 연수원장)의 이야기는 청산유수처럼(?) 구수하고 입담 좋게 이어지는 것이었다. 환하게 미소를 머금고 눈웃음까지 살살 치면서 -- 오늘날 대한불교조계종의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는 5세기경 고신라 시대(눌지왕 2년)에 고구려의 스님 아도화상이 선산(善山) 땅에 도리사(桃李寺)를 개창할 적에 함께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직지(直指)”라는 절 이름의 독특한 내력으로 말하면 세 가지나 된다. 첫째는 아도화상이 도리사를 창건할 때에 황악산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큰절이 세워질 자리(터)’라고 해서 직지사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는 것. 두 번째는 고려조 초의 고승 능여선서(能如禪師)가 절을 중창할 때 절터를 측량하기 위해서 ‘자(尺)를 사용하지 않고 다만 손가락으로 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야설은 훗날 민간에 의해서 전승된 하나의 미담(美談)이 아닌가 한다. 그러고 세 번째는 선종의 가르침인 경문에서 얻어온 것. 즉 ‘불입문자 직지인심 견성성불(不入文字 直指人心 見性成佛)’이 바로 그 뜻이다 등등 --
여기서 능여선사와 고려 태조 왕건 사이에 얽힌 전설 한 가지 -- 이양길 법사의 얘기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그 옛날 - 927년 11월 - 태조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이 한반도의 패권을 놓고 팽팽히 맞서서 자웅을 겨루던 시절의 이야기란다. 때에 왕건은 대구의 공산(公山) 벌 전투에서 견훤 군사한테 완전히 포위되고 대패하는 치욕과 불운을 겪게 되었는데, 그는 군사를 버리고 어쩔 수 없이 이곳 직지사 절간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그러자 능여선사는 그 왕건을 도와서 살아남게 하였고, 마침내는 황궁이 있는 개경(開京)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게 한 생명의 은인이란다. 그때 선사께서는 도망쳐 나온 왕건에게 하룻밤 사이에 3천 켤레의 짚세기를 삼도록 청하였다. 그래갖고는 그 3천 개의 짚세기 짝을 동짓달의 하얀 눈밭에다가 뿌려 놓게 하였다. 그러자 왕건을 추적해 온 견훤의 헐벗은 군졸들이 너도나도 그 짚신짝들을 줍느라고 대오가 흩어지게 되었으며, 그 참에 왕건은 살아남아서 화를 면할 수가 있었다. 사실이 그렇다면 능여선사야 말로 왕건 임금의 참된 생명의 은인 아닌가! 그날에 왕건이가 전사하고 말았다면 고려왕조 5백 년 역사의 물줄기는 견훤 쪽으로 그 방향이 바뀌었을지도 모르는 일. 우리의 역사에서 보면 그날의 팔공산 전투는 왕건이 일방적으로 당하는 확실한 참패였다. 그래서 충신 신숭겸 장군이 대신으로 왕건의 곤룡포 옷을 갈아입고 “가짜 왕”이 돼서 장렬하게 전사하고 말았던 것이다. 어쨌거나 왕건이 직지사 절간에 숨어들어서 구사일생 목숨을 구하게 된 일은 이와 같이 멋지고 아름다운 전설로써 되살아난 셈이다. 이때의 능여선사의 역할은 그로부터 10년 후에는 그 생명의 은인에 대한 왕건의 확실한 보답(?)으로 나타나게 된다. 직지사 사지(寺誌)에 따르면 936년(태조 19)에는 능여선사가 태조의 도움을 받아서 절을 크게 중창하였노라 기록하고 있으니 바로 이같은 설화를 증거하는 사연이라고 하겠다. 어찌 보면 역사의 기록이란 패배자가 아닌 승자의 아름다운 미담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황악산 직지사가 한때 동방 제일의 도량으로서 이름을 날릴 적에는 건물이 무려 250여 동에 2천 5백 명의 스님들이 머무를 정도로 큰 가람이었다고 전한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16세기에 임진왜란으로 대부분의 사찰 건물이 소실돼 버렸고 시나브로 사세(寺勢)가 기울어지기 시작하여 퇴락을 거듭하였다. 그러다가 현대에 이르러서는 1966년부터 현재까지 40여 년에 걸친 대불사가 진척되고 있다는 것.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밀양 표충사와 해인사의 홍제암, 그리고 이곳 직지사에 수천만 원씩을 배정하여 사명당 기념사업에 충당토록 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절의 분위기가 가지런하고 아담하며 사세가 풍성하다는 인상이다. 이러한 모든 불사는 절의 주지이자 동국대학교 이사장으로 있는 오록원 스님의 필생의 공덕이 아닌가 한다.
그 옛날 신묵화상에 의해 부처님 품안에 안김을 받은 어린 사명은 무럭무럭 자라나게 되었다. 젊은 사명스님은 18세의 앳된 나이에 버젓이 승과에 장원급제하게 되고, 벌써 30대에 직지사 주지 스님의 직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명스님의 위명은 날로 높아져서 나이 서른두 살 때 - 1575년(선조 8) - 에는 선종 본산인 한양의 봉은사 큰절에 주지직으로 천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명스님은 이를 한사코 마다하고, 갖은 풍상 속에 잔뼈가 굵어지고 몸담아 왔던 20여 년간의 직지사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금 구도의 길에 오른다. 멀리 평안도의 묘향산에 주석하고 계시는 서산대사 휴정 큰스님을 찾아서 더욱 용맹정진코자 홀연히 만행의 길에 올랐던 것이다. 우리는 그 옛시절 사명 큰스님의 체취와 유향을 더듬고자 경내를 이리저리 둘러보고 거닐었다. 8월의 따가운 햇살이 등짝을 어루만지고 바람 한 점 없이 맑고 청명한 날씨 속에 4백여 년 전 옛날이나 이제나 저만큼 어디선가 사명스님이 우리들을 손짓하여 부르시는 것만 같았다. 백팔번뇌 염주를 목에 걸고 주장자를 짚고 대웅전 섬돌 위에 우뚝 서 계시면서 “무명 중생들아! 나무관세음보살 --” 허허허.
우리는 먼저 대웅전 큰법당에 참배하고 나서 사명스님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사명각(四溟閣)으로 향하였다. 사명각은 대웅전에서 비로전으로 가는 길가의 오른쪽에 몇 그루의 소나무 숲 사이에 작은 몸채로 있었다. 사명각은 생각보다는 규모가 작고 어딘가 허술하다는 인상이다. 사명 큰스님은 부리부리한 눈매가 형안으로 돋보이고 코 밑에 긴 수염을 길게 늘어뜨리고 단정히 앉아 계셨다. 아마도 저 형형한 눈빛과 담대한 기상이야말로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으며, 또한 일엽편주로 일본 땅에 건너가 대장군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맞대면해서는 7년대전의 종전과 강화문제를 마무리짓고, 그러고 전란 중에 끌려갔던 가련한 우리 동포 수천 명의 생령을 내 나라 고국산천으로 돌아오게 할 수가 있었으리라.
그러나 나는 사명 큰스님의 나라와 백성과 중생을 사랑하는 평화와 박애정신과 보살사상에 앞서서 당신의 그 진취적이고 개혁적인 진보사상에 더욱 주목하고자 한다. 부처님 가르침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지 1천 2백여 년. 바야흐로 조선왕조의 숭유억불 정책 속에 부처님의 법등이 가물가물 인멸의 위기에 내몰린 수상한 시절에 허응당 보우대사(普雨大師)가 일어나서 불교 중흥을 크게 외쳤었다. 그러다가 양반 유생들의 질시와 모함으로 보우대사는 역적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장살(杖殺)되고 말았다. 그러자 젊은 사명은 태균스님(보우대사 시자승)과 더불어 대사의 글과 게송을 모아서 『허응당집(虛應堂集)』을 간행하게 되었고, 그 문집의 말미에다가 이렇게 “발문(跋文)”을 지어 바쳤던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젊은 사명스님이 장차 당신님 미래의 앞날 모습을 미리 내다본 것인지도 모르는 일 --
‘ -- 생각컨대 우리 대사께서는 한 구석 동방의 작은 나라에 태어나서 백세에 전하지 못하던 도의 깨우침을 얻으셨다. 지금의 학자는 이를 의지하여 돌아갈 바를 얻었고 우리 불도로 하여금 멸절치 않게 하였도다. 큰스님의 자취를 논하 자면 가히 천고(千古)에 홀로 왔다가 홀로 돌아가신 분이로다! ----’
우리 순례단 일행은 늦은 점심공양으로 시장기를 채우고 오후 3시 경에는 귀경 버스에 올랐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이면 이번 초행에서는 재일동포 박권희 회장님을 비롯, 이원경 고병익 임동권 박권흠 오재희 유종현 등등 국가 원로급 어른들을 모시고 떠난 여행길이 또 하나의 더없는 기쁨이자 보람이고 값어치라고 하겠다.
주 : 사명당유적지순례기 『그대의 목은 우리의 보배』 (사명당기념사업회, 2002)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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