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원로 이원경 선생을 기리... |
조 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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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사]
연극원로 이원경 선생을 기리며
선생님, 이원경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저- 경기도 용인에 있는 우거에 계시면서 이따금씩 전화를 올리면 그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이봐요, 성희씨?”하고 반갑게 웃어주셨는데, 인제는 그럴 수가 없게 되었군요. 선생님, 선생님이 그립습니다.
선생님과 나 백성희가 연극인연을 맺은 것은 반세기도 훨씬 넘는 오래전의 일입니다. 6.25전쟁의 포연이 자욱한 피난지 대구에서였지요. 때에 선생님은 무슨 ‘민예’인가 하는 극단을 창설하고 저에게 출연을 요청했습니다. 물론 선생님은 연출자이고 나는 배우로서, 그때의 작품명은 번역극 <제2의 운명>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서울환도 이후 1958년에는 명동 국립극단의 <리리옴>을 비롯해서, 당신께서 손수 쓰신 <수선화> 등등 여러 작품에서 우리는 호흡을 함께하며 50년을 넘게 살아왔습니다.
선생님은 다재다능한 연극인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연출가 무대미술가 극작가 대학교수 등으로, 큰 발자국을 남기신 연극1세대의 마지막 별이었습니다. 연전에 작고한 김동원 선생을 비롯, 이해랑 이진순 선생님은 모두 1916生의 동갑나기로 연극계의 '4인방'인데, 인제는 오늘로써 한국연극사의 제1장을 마감한 셈이군요! 일찍이 선생님은 청운의 뜻을 품고 일본미술하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일본신극의 발상지 ‘츠키지소극장’미술부에서 활동하다가 고국에 돌아와서, 한평생을 오로지 연극예술과 방송드라마에 몸 바치고 살아오신 어른입니다.
선생님의 큰 공적은 8.15 해방후의 ‘극단 민극’설립과 60년대에는‘극단 6.9’를 창단하고,‘3.1로창고극장’을 창설하신 일. 특히나 선생이 창설한 70년대의 '3.1로창고극장'은 소극장운동의 대명사이자 요람이요 메카였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추송웅의 '빨간 피터의 고백'도 여기서 태어났고, <검은 고양이> <우리들의 광대> 등등 귀에 익은 이름들입니다. 오늘날 대학로의 1백 개가 넘는 소극장들이 모두 선생님의 연극적 헌신과 은공이라고 하면, 어느 누가 이를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창고극장 얘기를 하니까 추억 하나가 떠오릅니다.
70년대 말께 제가‘3.1문화상’을 수상한 적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선생님이 심사위원을 하셨다는 사연을 알고 사례인사를 드렸더니 하시는 말씀. “성희씨, 아니야. 모윤숙 선생이랑 만장일치였어요. 하하.”하고 오히려 게면쩍어 하는 모습. 그로부터 선생님과 나의 둘만의 테이트는 시작되었습니다. 명동 시공관에서 공연이 있거나 연극연습이 있을 때면, 나는 번번이 창고극장 이 선생님께 전화를 겁니다. “선생님, 백성희가 데이트 신청? --” 그러면 선생님은 언제나‘좋아요’하고 흔연스럽게 대답하십니다. 우리의 데이트 장소는 명동성당의 맞은쪽 골목길에 있는 작은 불고기집. 지금은 그 불고기집 이름을 잊었습니다만, 우리는 쐬주와 불고기를 안주삼아 이런저런 연극 얘기를 꽃피웁니다. 그러면 선생님은 즐거워하십니다. 창고극장 운영이 너무나 힘들고, 자식 같은 젊은것들 붙들고 실랑이하랴, 이것저것 마음 상하고 피곤도 하셨을 텐데, 아마도 나와의 만남이 어느 한편 작은 위로와 기쁨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성희씨 말야. 나는 사실은 유럽의 <파랑새>나 <황태자의 첫사랑> 같은 작품을 매우 좋아해요! --” 선생님은 겉보기엔 냉정하고 차갑고, 말씀도 칼 같은 분입니다. 그런데 꿈을 쫓는 ‘파랑새’나 ‘첫사랑’을 좋아하다니, 너무도 의아하고 뜬금없는 말씀. 우리 이원경 선생 마음속에 저런 고분고분하고 따뜻한 일면도 있었나? --
이원경 선생님, 옛날 제자들이 부르는 선생님의 별명이 뭣인 줄 알아요? 그때는 한강 너머 상도동에 살았니까, ‘상도동 대머리’랍니다. 모르셨지요? ‘상도동 대머리’님이여, 인제는 이 세상의 근심 걱정 훌훌 털어버리고 편안히 쉬십시오. 저세상에서 ‘연극인 4인방’친구들하고 다시 만나서, 즐거운 연극 이야기도 많이많이 나누십시오.
삼가 이 선생님을 애도하며, 길이 명복을 누리소서!
2010년 12월 7일
불초 백성희 합장 (노경식 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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