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영웅' 이야기 (역사극) |
문학강연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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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집 서울- '수요문학광장' 107 (강연요약)]
<두 영웅> 이야기 * 四溟 惟政 : 1544(중종 39) - 1610(광해군 2, 66 卒), 임진년 48세 * 1604. 8. 20. 부산 다대포 출항 → 1605. 5. 5. 부산 귀국, 6월 초순 어전 復命. (일본 교토에서 3개월을 보냄)
<두 영웅>은 내가 2007년에 발표한 장막 역사극의 제목입니다. 副題는 “사명당- 日本에 건너가다”로, 16세기 말엽 임진왜란의 7년대전이 끝나고, 조일 두 나라 간의 전후처리와 평화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강화회담이 일본 교토(京都)에서 열리게 됩니다. 일본의 영웅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조선의 영웅 사명당 유정대사(惟政大師) 사이에. 그당시 일본 관백(關白)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조선을 침략함으로써 일으킨 무모하고 참혹한 침략전쟁은 중국(明)과 일본과 조선(한국) 등 세 나라의 동아시아 국제정세에 크나큰 판도변화를 초래하게 된다. 때에 사명대사-- 일본에선 ‘송운대사’(松雲大師)로 알려져 있음-- 는 금강산에서 내려와 義僧將이 되고, 그는 전후 10여 년 동안 나라와 백성을 구하고자 世俗에 머무르면서 노심초사 동서남북의 전진(戰塵) 속을 헤맨다.
사명대사 유정은 조선 구국의 ‘호국성사’(護國聖師)이다. 임진정유의 전란이 끝나고 산속으로 돌아갔던 사명당은 그 6년 후(1604, 60세)에 조정(나라)의 부름을 받고 다시금 산사(山寺)에서 내려온다. 그리하여 동해 바다를 건너서 일본국 적지(敵地)로 향한다. 사명당은 이미 육순의 환갑 나이에 사지(死地)나 다름없던 적의 소굴을 찾아, 일엽편주 범선(帆船)에 늙은 몸뚱이를 싣고 거치른 풍파를 헤쳐 나아갔던 것이다. 다만 사명당 큰스님이 가진 것이라고는 목에 걸고 있는 백팔염주와, 한 손에 잡고 있는 석장(錫杖)에 목탁 한 가지뿐. 그당시 조선과 일본 두 나라 사이는 전쟁의 전후처리 문제로 “평화교섭”이 지지부진한 상태-- 특히나 조선 백성과 조정의 일본국에 대한 적개심과 불신 및 의구심은 극에 달해 있었다. 그렇다고 새로 들어선 도쿠가와막부(德川幕府)의 거듭되는 화해요구를, 언제까지나 무작정 거절하고 외면만 하고 지낼 수도 없는 일. 그러므로 불구대천의 원수 일본의 진심(眞心)과 실상(實相)을 탐색키 위하여 조정에서는 비공식사절을 파견키로 정한 것. 이에 사명당은 강화사(講和使)란 비공식사절로 “탐적사”(探賊使)가 되어, 국사(國事)의 막중한 책무를 띄고 도일(渡日)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명당 일행은 쓰시마(對馬島)를 거쳐서 일본 쿠슈의 나고야(名護屋)와 본토의 오사카(大阪)를 지나고, 도쿠가와막부의 본거지 교토(京都)에 도착한다.
이 작품의 연극적 활동무대는 전적으로 일본의 교토(京都) 일원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후시미조오’(伏見城)와 ‘니죠조오’(二條城) 및 ‘코무덤’(鼻塚하나즈카, 耳塚미미즈까)이 있는 方廣寺 절, 그리고 사명당이 거처했던 本法寺와 興聖寺 절간 등등--- 사명당이 쓰시마 도주(島主) 소오 요시토시(宗義智)와 승려 겐소(玄蘇) 등의 선도를 받아가며 교토에 도착한 것은 1604년 갑진(甲辰) 12월 27일의 일. 여기서 그는 그해 세모(歲暮)를 넘기고 새해를 맞이하는데, 섣달 그믐날 밤에 지은 시 <在本法寺 除夜>는 먼 이국땅에서의 사명 노스님의 외롭고 간절한 심사를 잘 토로하고 있다.
‘본법사(혼포지) 절간의 제야에
사해(四海)에 떠도는 송운 늙은이 행장과 뜻이 서로 어긋난다 일년 한 해도 오늘밤이 다하는데 만리 머나먼 길 어느 때나 돌아가리 입은 옷은 오랑캐 땅의 비에 젖고 시름은 절간 사립문 안에 갇혀있네 향 피우고 앉아서 잠을 못이루니 새벽 눈이 또한 부실부실 내리는구나.‘
사명당과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후시미성(城)에서 대좌하고, 정치적 외교적 담판을 벌인다. 이에야스는 말한다. ‘지난번 전쟁 때 나는 간토(關東) 지방에 있어서 군사를 움직이지도 않았으며, 귀 조선과 나 사이는 실로 원수 진 일이 없소이다. 그러므로 청컨대, 우리는 화호(和好)를 통할 것을 조선국에 바라는 바입니다.’ 이와 같이 그는 풍신수길의 조선침략 때에, 본인이야말로 아무런 책임도 과오도 없었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장래에 있어 일본은 조선국과 화친하기를 원하며, 양국이 서로 전쟁도 없고 평화롭게 통상하면서 선린화호(和好) 속에 오래 지속되기를 바란다는 그의 평화의지와 진심을 천명한다. 사명당 또한 지난 전쟁에 있어 풍신수길의 명분없고 무모하고 일방적인 침략행위를 규탄하고, 전란 중에 발생했던 양국간의 ‘무고한 생령들’의 죽음과 물질적 재산상의 피해를 설파한다. 그리고 일본국의 진정한 화평의지와 신뢰를 증거하는 뜻에서, 전쟁 때 일본에 끌려왔던 조선 양민의 본국송환(刷還)을 강력하게 요청한다. 이름하여 “조선피로인”(朝鮮被虜人) -- 돌이켜보면 전란 중에 일본 왜군은 수많은 전적(典籍)과 불상(佛像), 금속활자와 도자기 등등 다량의 문화재를 약탈 도적질해 갔음은 물론, 남녀노소 수만의 백성들을 살육하고 납치하고 끌고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사명당 일행은 조선 백성 1390여 명을 50척의 범선에 태우고, 쓰시마 도주 소오 요시토시와 승려 겐소 등 일본인들의 환송을 받으며 그리운 귀국길에 오른다. (이 조선 피로인의 본국쇄환은 이후 국교가 수립되고 조선통신사의 정식사절이 파견됨으로써, 1643년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무려 반세기 동안이나 계속된다)
이와 같이 그들 두 영웅의 만남과 교유(交遊)는 이후 260여 년 동안이나 지속되어 온 양국의 평화와 선린우호 및 동북아시아 평화의 초석이 되었음은 역사가 증명하는 바이다. 침략과 전쟁의 위기시대로부터 번영과 평화의 선린시대로, 또한 불행했던 역사의 물줄기가 새로운 방향전환을 모색하고 실천한 것이다. 우리들의 이웃나라 작금의 일본이 19세기 후반에 “메이지유신”(明治維新)에 의해 제국주의 열강시대로 탈바꿈하고, 잔혹한 팽창주의 침략전쟁을 일삼기 전까지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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