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발표 : 노경식희곡작가 원고정리 : 정종명소설가․문협 편집국장 토론일시 : 2010년 4월 30일 오후 2시 토론장소 : 예총회관 2층 회의실
반갑습니다. 저도 이사(理事)로 문인협회에 발을 들여놓고 있습니다. 『월간문학』을 통해 작고문인을 재평가하는 모임이 있다는 사실은 진작부터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 희곡 쪽은 작년인가 재작년에 동랑 유치진 선생의 문학을 점검하셨지요? 그리고 이번에 희곡작가로서는 차범석 선생이 두 번째 순서인 것으로 압니다. 차범석 선생은 제가 생전에 어른으로 가까이 모셨습니다. 술자리도 늘상 함께한 적도 많구요. 문협에서도 저한테 청탁을 할 때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마는, 오늘 강연은 선생님의 학술이나 문학적 업적은 잠시 뒤로 미루고, 주로 개인적인 삶의 궤적에 초점을 맞춰서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보시는 것처럼 제가 이 어른의 일생에 관한 유인물을 개요 형식으로 마련했습니다. 읽어가면서 설명하고, 또한 부족한 부분은 보완하는 형식으로 차범석의 문학과 삶을 점검해 보겠습니다. 저희 같은 희곡작가는 대개 양수겹장이 됩니다. 희곡 한 편을 발표하게 되면 그 작품이 무대 위에 올라가서 공연되어야만 제대로 평가를 받습니다. 우리뿐만이 아니고 영국의 셰익스피어도 그랬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희곡하는 사람들은 시나 소설을 쓰는 사람쪽보다는 연극하는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게 됩니다. 연극연출이나 배우, 그런 극단 쪽 사람들과 어울려서 자연스럽게 술 마시고 놀지요. 원론적으로 얘기하자면 시, 소설, 희곡이야말로 문학의 3대 장르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곡 분야는 뒤로 슬며시 빠진 것 같고, 시나 소설 쓰는 사람들을 자주 못보게 되니까 조금은 서먹서먹하고 그렇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차범석 선생을 오랫동안 모셔 왔었고, 또 돌아가신 지도 몇 해가 안 되었습니다. 그 어른의 인간 됨됨이라든지 예술관, 이런 것들을 내가 알고 느끼고 있는 대로 솔직하게 가식 없이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차범석 선생은 우리 연극계와 희곡문학에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한 봉우리입니다. 제가 유인물을 읽어가면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차범석(1924-2006) 선생은 6․25 한국전쟁의 전후문학 1세대로서 50여 년 동안 전통적 사실주의에 입각한 희곡작품을 발표하여, 한국적 개성이 뚜렷하고 향토성 짙은 리얼리즘연극을 확립하는 데 공헌한 대표적인 극작가이다. ――유민영, 「한국 사실주의극의 高峯 차범석」(『한국인물연극사 2』, 2006)
차범석 선생은 지난 2006년에 작고하셨습니다. 돌아가시기 5년 전에 󰡐나의 연극인생 50주년󰡑이라는 잔치를 조촐하게 삼청각(三淸閣) 음식점에서 벌인 적이 있었습니다. 저희들도 물론 참석했습니다. 그날의 모임은 당신이 그렇게 주선한 것이 아니라, 당신님 주변에 계시는 연극, 문학, 무용, 미술, 음악, 영화 등 각계의 절친한 많은 인사들이 예술인생의 회혼(回婚)에 해당하는 50주년을 그냥 넘길 수 없다 하여 그렇게 마련한 잔치였지요. 차 선생님은 그러니까 1955년도의 조선일보 신춘문예 희곡부문에서 단막극 <밀주>가 가작으로 입선의 영예를 차지했습니다. 그러고 그 이듬해엔 다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도전해서 <귀향>이란 작품이 당선되었고, 본격적인 작가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것이 차 선생의 공식적인 등단년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때 여쭈어 보았습니다. 등단은 1955년인가 1956년이므로 계산상 50주년이 안되는데요? 그러니까 선생님 말씀이, 1951년 3월에 당신의 고향인 목포에서 목포중학교 국어 선생을 하고 계셨는데, <별은 밤마다>라는 2막짜리 연극을 처음으로 무대에 올렸다는 겁니다. 선생은 연희전문학교에 다녔는데,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고향 목포로 돌아가 중학교 교사로 재직했지요. 그래서 <별은 밤마다>를 무대에 올리면서 당신 스스로 창작하고 연출도 하고 주인공 역도 맡으셨다고 합니다. 선생은 그때를 당신의 연극 인생의 출발로 보셨고, 그렇게 계산하면 2001년이 50주년이 됩니다.
저도 <별은 밤마다>라는 작품을 읽어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출연했던 김길호라는 배우를 통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김길호씨는 오늘날에 대 연극배우로 성장했는데, 당시는 목포중학교 학생이었던 걸로 압니다. 그 분한테 <별은 밤마다>가 어떤 스토리였느냐고 물어 보니까 <산불>의 전작으로 이해하면 된다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렇습니다. 작품의 주인공이 학교 선생님 하다가 전쟁이 일어나니까 인민군 쪽에 붙어서 부역 활동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국군이 수복해 들어오니까 산으로 도망쳐 입산을 하게 되었고, 나중엔 참회하고 자수를 해서 고향 집으로 돌아온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그의 대표작 <산불>이란 어떤 작품인가? <산불>은 1962년에 국립극단에서 공연한 작품으로 선생의 대표작 중의 하나입니다. 어느 산간마을이 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니까 어떤 젊은이는 군대에 가고, 어떤 청년은 산으로 붙잡혀 가고, 또 어떤 사내는 인민군에 부역을 하고, 그래서 온 동네가 그만 여자들만 남아 있는 과부 마을로 변해 버렸습니다. 그런 마을에 어느 날 한 남자가 산에서 내려와 대밭으로 숨어들고, 그 모습을 두 사람의 새파란 여인네가 그 빨치산 남자와 맞닥뜨리게 됩니다. 젊은 과부는 그 사내를 몰래 도와주고 먹을 것까지 갖다 줍니다. 옆집의 또 한 젊은 과부가 그런 두 젊은이의 불륜관계를 가만 둘 리가 없지요. 왜 너만 재미를 보느냐, 나도 재미 좀 보자 하고 원초적인 애욕에 불붙어서 끼어듭니다. 급기야는 한 빨치산 사나이를 가운데 두고 두 젊은 과부와의 삼각 애욕이 적나라하게 표출됩니다. 그리하여 대단원은 공비 토벌의 작전계획에 따라 국군이 마을에 들어와서 그 울창한 대숲을 모조리 불태워 버립니다. 한 과부는 입덧을 하고 자살하게 되고, 그 빨치산 사내는 결국 불에 타서 개처럼 죽어가고 맙니다. 참으로 비극적인 결말이지요.
차범석의 <산불>은 현재 리얼리즘 연극에서는 가장 높이 평가받고 있는 작품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우리는 처음부터 러시아와 아일랜드 등의 리얼리즘 문학을 주로 받아들였습니다. 일제 때 동랑 유치진 선생은 1930년대에 리얼리즘 문학으로 <소>, <토막> 같은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그런 전통과 연유로 해서 지금까지 수많은 리얼리즘 작품이 창작되었고, 또 되고 있습니다만, 현재 리얼리즘 문학의 최고 걸작이랄까, 대표적인 작품을 시대 순으로 살펴보면, 한 세대와 봉우리를 넘어설 때마다 대표작 한 편씩이 나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제 1세대에 해당되는 것이 유치진 선생의 <소>와 <토막>으로 보고, 전후세대에 와서는 1950년대와 60년대를 거치면서 차범석의 <산불>을 두 번째 봉우리로 손꼽고, 그 다음 1970년대에 들어와는 불초 노경식이가 <달집>이라는 작품을 써냈습니다. 제가 본인의 이야기를 하게 돼서 외람스럽습니다만, 흔히 하는 말로 한국 리얼리즘 연극의 세 편은 <소>, <산불>, <달집>으로 평가가 됩니다.
그건 그렇고, 50주년 기념행사를 한 그 해에 선생은 일곱 번째 희곡집 『통곡의 땅』을 상재하셨습니다. 그 다음 2년 후 2003년은 당신의 팔순이 되는 해가 됩니다. 80세가 되니까 옆에서도 그렇고 당신도 그렇고, 팔순을 그냥 넘길 수 있느냐 해서 희곡집을 하나 냈습니다. 그것이 당신님의 생전 마지막 희곡집이 되었습니다. 여덟 번째 희곡집, 그것이 『옥단어』입니다. 주인공 소재 ‘옥단’은 실제로 목포에 있던 어떤 물지게꾼 여자의 이야기인데, 조금 이따가 제가 보충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그해 2003년 가을에 여기 대학로의 아르코대극장에서 <옥단어> 대공연을 했는데, 공연이 대단히 성공적이었고, 평가도 역시 좋았습니다. 사람이 늙어가고 병들고 그러면 고향 얘기 쪽으로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 왜,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는 옛말이 있잖습니까. 여우란 놈이 죽을 때는 제 머리를 자기 살던 굴 쪽으로 두고 죽는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저는 시를 잘 모르니까 언급을 피하겠습니다만, 소설 같은 것은 그렇다고 합니다. 밖으로 나갔다가도 나이 들고 하면 다시금 자기의 뿌리나 터전으로 돌아오곤 하는데, 문학이나 연극에도 그런 작품 경향이 많습니다. 차범석 선생의 <옥단어>도 그런 범주의 작품이라고 보면 됩니다. 여기 그 희곡집 『옥단어』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생전의 선생님은 진짜 부지런하시고 욕심이 많은 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순수희곡도 쓰시고, 뮤지컬도 하시고, 오페라도 하시고, 무용 대본도 쓰시고, 못하셨던 게 없었습니다. 이 책 『옥단어』의 ‘머리말’에서 차범석은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습니다.
작품 「처용」은 뮤지컬이고, 「백록담」은 오페라이고, 「옥단어」는 정극이고 보면 나도 어지간히 욕심꾸러기라는 생각이 들지만 원래 천성이 가무와 신명을 마다하지 않은 터이고 보면 그것 또한 나의 숙명의 별자리에 이미 나타나 있을지 모른다.
언제나 곁에서 모시다 보면 차 선생은 참 끼가 많은 분이다, 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춤도 잘 추시고, 노래도 잘 하시고 그랬습니다. 선생님이 마이크를 들고 노래를 시작하면, 반드시 18번은 김추자의 <님은 먼 곳에>였는데, 그 노래를 절창하면 좌중의 모든 이가 껌벅 죽었습니다. 어느 해인가는 세계 ITI총회가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렸었는데, 선생님이 ITI 희곡분과 회장으로 선출되셨답니다. 내가 알기에 외국어라면 일본어만 능통하신 정도인데, 어떻게 해서 희곡분과 회장이 됐느냐고 물었더니, 대답이 아주 간단해요. ‘야, 그거 간단하더라. 내가 노래 한 곡조 뽑았더니만 회장 시켜 주던데--’, 그래요. 그러고 보면 농담도, 유머감각도 좋으셨습니다. 그것도 아마 타고난 끼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제가 준비해 온 글의 한 대목을 짧게 읽겠습니다.
차 선생은 이와 같이 그새 2년 동안에 무려 세 편의 신작을 정력적으로 완성한 것이니까, 예술문학에 대한 그의 집념과 욕심, 열정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러고 덧붙여서 가무와 신명이 깃들어 있는 어느 별자리에서 천성적으로 타고났다고 한 말씀은 본인 스스로가 그의 예술적 삶과 인간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고 실토한 것이라고 하겠다. 차범석은 한마디로 예술적 󰡐쟁이 기질󰡑을 타고난 󰡐딴따라 광대󰡑이다. 그렇지만 그는 전라도의 지주계급 천석꾼의 양반 자제로서 그 명예와 품위를 결단코 놓친 적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차범석은 선대(아버지)가 지주 집안이었음을 앞세워 그걸 코에다 걸고서 자랑하거나 뽐낸 적도 결코 없었다.
제가 왜 이런 글을 썼느냐 하면 이유가 있습니다. 보통 딴따라 기질이 있다고 하면 여러 가지로 좋지 않은 선입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옛날에 전라도 목포 지방에 가면 두 명의 부자(富者) 집안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소설가 박화성 선생의 천 부자, 그 어른 댁이 차 선생 님보다는 월등한 부자였답니다. 어느 날 목포에 함께 내려가면서 천석꾼이라고 하던데 그게 사실입니까 하고 물어 본 적이 있습니다. 하니까 차 선생은 가볍게 미소 지으면서 ‘1천 석은 안 되고 7백 석 지기’는 됐다고 하시더군요. 우리가 천석꾼이다, 만석꾼이라고 말하는 것은, 곧 소작료를 의미합니다. 논밭에서 나오는 나락 소출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소작인들로부터 받아들이는 ‘소작료’를 가마니로 환산한 단위를 뜻한다, 그런 말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넓은 땅을 갖고 있었는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우리 차 선생님은 그 많은 유산을 한 푼도 받으신 게 없다고 하더군요. 선생님은 둘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셋째아들이 차재석 선생인데, 한국전쟁 당시 피난시절에 김동리 선생을 포함한 많은 문인들의 뒷바라지를 마다하지 않은 분이었습니다. 차재석씨는 당신 스스로도 시를 쓰신 분인데, 그 분의 신세를 안 진 문인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 분은 당신 스스로 목포 지역의 문화예술 활동에 열성을 다하셨는데, 가령 서울에서 어느 문인이 목포에 왔다고 하면 전부 먹이고 재우기를 도맡았다고 합니다. 차재석씨는 그런 식으로 받은 유산을 모조리 탕진(?)하다시피 했는데, 차범석 선생은 유산을 한 푼 받은 게 없대요. 훗날에 서울로 올라오실 때도 솥단지 하나, 숟가락 몇 개, 이런 것만 들고 상경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차 선생 당신은 지주계급 출신이라는 사실을 한 번도 뽐내신 적이 없습니다. 선생님은 가끔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누구는 부자라고 하지만 내 아버지가 부자일 뿐 나는 부자 아니야 ----‘. 그러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연극계에서는 공교롭게도 어른들이 부자이고, 지주계급 출신들이 많습니다. 동랑 유치진 선생도 그렇지만 춘강 박승희 선생의 선대는 주미특파대사 박정양이고, 박진 선생도 아버지께서 관찰사를 지내신 양반 귀족계급이거든요. 여자 문제도 그렇게 난잡하지 않습니다. 초성 김우진 선생이 일본에서 나올 때 현해탄에서 윤심덕과 투신했다는 설이 있는데, 그 집안에서는 그런 말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작고했습니다만 그의 아드님이 서울대 국어학과 교수로 있었는데, 그 분을 만났을 적에 슬쩍 물어보았더니 인정을 하지 않더라구요.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얘기가 약간 다른 데로 흘러가고 있는데요. 6․25 전쟁 때에 그랬었답니다. 국군 선무공작대라고 해서 연극단을 만들어 갖고 일선에 위문공연을 갑니다. 가서는 그날의 공연 일정이 끝나고 나면 밤엔 여인숙 여관에 묵게 되는데, 노래 부르는 가수부대가 따로 있고, 연극부대가 따로 있고 그렇습니다. 그당시의 여관이나 여인숙이라는 것은 대개가 일본식 집이었습니다. 가운데의 조그만 마당을 중심으로 빙 둘러서 방이 나란히 붙어 있는 그런 가옥 구조 아닙니까. 마당에는 화초 같은 작은 꽃밭이 있고요. 가설무대의 밤 공연이 다 끝나고 나면 정훈장교가 찾아와서 우리 사단장님이, 우리 연대장님이, 우리 참모장님이 어쩌고 하면서, 2차의 뒤풀이 위로파티를 갖는다는 핑계로 여배우들을 데리러 옵니다. 그래서 연예계 쪽은 잘 따라나갑니다. 그런데 연극 쪽 사람들은 어림도 없습니다. 절대 못 나갑니다. 왜 그러냐? 단장님 격의 이해랑 선생님이 제일 바깥쪽, 대문이 있는 문간방에 떡 버티고 계시는 거예요. 누군가 대문 열고 들어오면 흠흠 헛기침 하고 인기척을 내는 바람에, 여름철 같은 때는 방문까지 확짝 열어놓고 지키는 바람에 왔다가도 도로 나가 버립니다. (웃음) 해랑 선생님은 그렇게까지 우리 여배우들을 보호하셨다고 합니다.
차 선생님도 당신이 쟁이 기질을 타고 났다고는 하나 양반지주 자제로서 역시 체통과 위신을 잘 지키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까 말씀을 드렸지요? 차범석 선생은 1923년에 천석꾼 부자의 3남 2녀 중 둘째아들로 태어나 목포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전남 광주로 나가 지금의 광주일고를 졸업했습니다. 그러고 1942년부터 1945년까지는 일본 동경에 계셨는데, 나중에 제가 동경에 가서 뭘 하셨느냐고 물어 본 적이 있습니다. 한 2년여 동안 재수 생활을 하면서 연극과 영화 같은 것을 많이 보신 것 같아요. 그런 문화예술 분야 체험이 본인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겠죠. 그러다가 광복 되던 해 봄에 돌아오셨는데, 징병 나갈 나이였습니다. 목포의 북교초등학교에서 잠시 선생(2종훈도) 노릇을 하다가 1945년 6월 달에 소집이 됐습니다. 그런데 남양군도로 끌려간 게 아니라 제주도로 갔다니까 이것도 아마 부잣집이니까 빽을 써서 그랬겠지요. 사진도 있더라구요. 그리하여 불과 두 달 만에 8․15 해방을 맞습니다. 선생님은 1946년 광복 이듬해에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고, 그 학교 극예술연구회에 들어간 겁니다. 연세대학교 극예술연구회는 지금도 면면히 이어오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 어른이 바로 극예술연구회를 만들어서 학생극을 시작한 것이죠. 그 무렵 같은 시기에 고려대, 중앙대 등에서도 대학극 활동이 활발했던 것 같아요. 때에 동랑 유치진 선생이 제1회 전국대학연극 경연대회라는 것을 창설하였는데, 차 선생도 거기에 참가해서는 당신 혼자 <오이디푸스왕>을 번역도 하고, 출연도 하고 우수상도 받았다고 합니다. 젊은 차범석과 유치진 선생과의 만남은 그때가 초면이었는데, 그게 쭉 한평생 이어집니다. 특히 대학생 신분의 고려대의 김경옥과 최창봉, 무용 전공의 조동화 선생 등과 친분이 두터워져서 1949년엔 「대학극회」를 조직해 활동하다가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학업을 중단, 귀향하게 되고, 아까 말씀대로 목포중학교에서 이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던 1956년까지 5년여를 교사 생활과 학생극 운동에 열성을 바칩니다.
목포 출신의 연극인은 물론이고, 문인 제자도 많습니다. 소설가 천승세, 시인 김지하와 정일성 연극연출가 등 모두가 목포중학교 제자들이지요. 시인 김지하도 연극반이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김지하는 부엌 키에다가 콩이나 서숙 같은 곡물들을 담아서 좌우 앞뒤로 천천히 흔들어댐으로써, 실감나게 ‘파도 소리’의 효과음을 재현하였지요.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효과음을 잘 내지 못한다고 해서 선생님한테 뺨을 맞았다고도 합니다. 그러다가 195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희곡이 당선되었는데, 이때 심사위원이 바로 유치진 선생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대학교 시절에 처음으로 만나서 눈여겨보셨던 셈이지요. 차 선생님이 만년에 내놓은 자서전 『떠도는 산하』가 바로 그것입니다. 여기서는 자신의 출생부터 자세하게 설명해 두고 있습니다. 차 선생은 그당시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의 무용을 여덟 살 때 비로소 보았습니다. 최승희 무용단이 목포에 와 공연을 하는데, 할머니인가 어머니를 따라가서 봤다고 합니다. 불과 10세 미만의 어린 나이였지만 예술적 감동 같은 어떤 정서가 자신도 모르게 전류처럼 심취 되더랍니다. 그와 같은 예술적 감흥과 정서가 훗날 문학 예술로 가는 길에 큰 도움이 된 것 같다고도 피력했습니다. 또 일본 동경에서 2년 동안 재수 생활을 할 때 연극과 영화를 본 것과, 연희전문 시절의 학생극 활동 등등 그런 것들이 차 선생으로 하여금 문학예술에 투신하는 한 밑바탕이 되었노라고 『떠도는 산하』에서 밝히고 계십니다. 앞서 말씀한 대로 1956년의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귀향>이 당선됩니다. 이를 기화로 해서 차 선생님은 서울로 진출하게 되는데, 처음에는 덕성여고 국어교사 자리에 취직하게 됩니다. 덕성여고로 옮겨 오게 된 것은 박화성 선생께서 다리를 놔서 이루어졌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러고 이때 「제작극회」라는 동인극단을 만들게 됩니다. 그것이 그 후로, 요즘 말하는 「자유극장」,「민중극장」,「실험극장」,「여인극장」 같은 동인제 극단의 효시가 되었지요. 195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제작극회」의 활동이 두드러집니다. 연극평론가 서연호 고려대 교수는 ‘기성 연극인들의 낡은 연극을 비판하면서 연극의 새로운 중흥을 꿈꾸었던 극단󰡑으로 제작극단의 위상과 의의를 높게 평가합니다. 차범석은 1961년에 학교를 그만두고 MBC 연예과장으로 전직하고, 편성국장 등을 역임하게 됩니다. 이 무렵 차 선생은 연극 운동가로서 연출가로서 극단 「산하」를 창단 운영하면서 큰 업적을 남깁니다. 「산하」의 창단 동인을 보면 오화섭, 김유성, 이기하, 임희재, 강효실, 천선녀, 김성옥, 이순재, 전운 등 기라성 같은 당대의 극작가와 연출가, 배우들이 망라됩니다. 제가 가만히 따져 보니까 선생이 MBC 방송국에 계시니까 그 파워와 영향력이 막강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선생은 「산하」를 창단하면서 ‘대중연극’ 운동을 제창하셨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순수연극이란 것이 소수 극작가와 지식인과 배우들, 소위 인텔리겐차들만 선호하고 좋아하면 되겠느냐, 연극이 대중 속에게 뛰어들어가 일반대중을 끌어올리자는, ‘대중연극 운동’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게 됩니다. 이것이 계기가 돼서 이태주, 유민영 같은 젊은 교수 평론가들이 대중에 야합한다고 하여 “연극예술의 타락” 이라고 지적을 가하게 됩니다. 소위 순수연극의 타락이라고 해서 논쟁이 아주 심했었지요. 차범석 선생은 이에 대해서 연극을 타락시키자고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고 해명했습니다. 연극하는 것이 너무 힘들고, 맨날 빚이나 지고 하니까, 좀 많은 양식있는 사람들이 연극을 보게 만들고, 또한 극장표도 좀 많이 팔아봤으면 해서 “대중연극”이라는 어휘를 사용하게 되었다는 것이죠. 어쨌든 1956년에 등단을 하고, 1960년대에 「극단 산하」를 운영하면서 당신의 창작품도 많이 올렸습니다. 그러니까 1960~1970년대까지 가장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셨지요. 흔히들 1960년대는 차범석 연극의 황금시대를 구가했다고 말합니다. 아까 말씀대로 한쪽 장르에만 치우치지도 않았어요. 당신 스스로 원래 끼와 욕심이 많아서 그랬는지, 또 발이 마당발이고 노래를 잘 불러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차 선생은 방송드라마도 쓰고, 오페라도 쓰고, 무용극도 쓰고 다방면에서 재능을 보여 주었습니다. 특히 우리가 기억에 남는 방송드라마로는 MBC의 <전원일기>를 들 수 있습니다. 1980년대는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굉장히 어렵고 힘들어 하던 시절입니다. 경제적 근대화의 미명과 황금만능의 시류 속에 시나부로 뿌리를 잃어가는 “고향과 전원”의 사라져감을 마음 아파 하고, 너무 각박하게만 살아가는 도시적 삶의 일상성에서 잠시 떠나, 농촌 서정을 그려 보는 게 어떠냐 하는 아이디어를 갖고 방송국에서 차 선생을 방문케 된 것입니다. 차 선생님도 흔쾌히 공감하고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드라마 무대를 경기도 근처의 한 농촌으로 설정하고, 제목도 <전원일기>로 해서 찍었는데 엄청난 인기를 몰아서 장시간 방영을 하게 되었지요. 저 역시 어느 출판사에 재직하고 있을 때인데, 제가 두 번째 주자, 작가로 나서서 서너 달 극본을 쓴 적도 있습니다. 월급쟁이 생활 하면서 극본을 쓰려고 하니까 잘 안 되더라구요. 하여간 <전원일기>는 한국방송의 TV 드라마 사상 큰 획을 그은 작품으로 평가를 받습니다.
이 어른은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극단 산하」를 운영하셨습니다. 극단 하나를 운영한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는 않았습니다. 극단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돈을 버는 족족 여기다 갖다 쏟아붓는다고 보면 됩니다. 당신은 딱 10년만 한다고 마음먹고 「산하」를 시작한 것이었는데, 그러니까 1983년도에 ‘마지막 공연’을 하면서 거기다가 대표자의 이름으로 그런 내용을 밝혔습니다. 인제는 “10년만에 자진해산”을 하겠노라고. 그래서 주위의 많은 연극인과 기자들이 모두 쇼크를 먹었던 일이 있습니다. 그러고 일부에서는 비판적인 시선을 보내기도 했었지요. 「극단 산하」를 당신이 만들었다고는 하나, 여러 연극배우들이 소속되어 있는데, 당신 혼자서만 해산한다고 독단적으로 결정해 버릴 수 있는 것이냐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얼마나 오죽 힘들었으면 그렇게 하셨겠느냐 하고 동정하고 수긍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이 어른의 약력은 참 대단합니다.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중앙위원, 한국연극협회 이사장, 예총부회장, ITI한국본부 부위원장, 만년에는 교육자로서 청주대학교 예술대학장, 서울예술대학 교수, 서울88예술단 단장, 한국문예진흥원 원장(한국문화예술위 전신),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등을 역임하셨습니다. 2001년에는 목포에 있는 대불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게 됩니다. 당신이 소장하고 있던 모든 장서를 이 대불대학 도서관에다 기증했습니다.
인제는 차 선생의 만년작 중에서 손꼽히는 자품 <옥단어> 이야기를 말씀해야 할 차례입니다. 앞서 말씀드렸습니다만 작품성도 탁월하고 공연도 성공적이었습니다. <옥단어>는 당신이 이 책에다가 ‘작품해설’을 써 놓았습니다. 거기에 자세하게 쓰셨어요. 󰡐옥단어󰡑라고 하는 것은 󰡐옥단아󰡑하고 부르는 호칭인데 󰡐아󰡑발음보다는 ‘어󰡑발음에 가깝게 들린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표기했다고 합니다.
옥단이는 1930년대 초반부터 1950년대 후반까지 목포에서 살았던 실존인물이다. 목포 지역에서는 목포의 4대 명물(?)로 󰡐역전의 맬라꽁󰡑, 󰡐평화극장 외팔이󰡑, 󰡐대성동 쥐약장수󰡑 그리고 옥단이가 손꼽힌다. 이들은 모두가 실존인물이되, 서민생활과 밀착되었을 뿐만 아니라 모두가 지체부자유자들이지만 서민들과 친숙했었다. 그 인간미가 한결같이 고왔던 사람들이라 지금도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옥단이는 유일하게 여성이었고, 가장 인간성이 좋고 많은 일화를 남긴 점으로 지금도 50대 이상의 사람들에게는 친숙한 이름이다.
옥단이가 실존인물이라는 것도 밝혔습니다. 한번은 제가 목포의 4대 명물에 대해서 물어 본 적이 있습니다. 목포역 앞이 바닷물이 들고 도랑처럼 물이 흐르는데 거기에 징검다리가 놓여 있었다. 이 ‘맬라꽁’이라는 사람은 지게꾼인데, 장마가 지거나 하면 어린애들을 자기의 지게에다 얹어서 건네 준다는 겁니다. 또 나중에 다리를 놓을 때도 자기가 번 돈을 몇 푼 내놓았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본인은 정작 몸이 부자유스런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평화극장 외팔이’는 극장 기도로 표 받는 사람이었고, ‘대성동 쥐약장수’는 그때는 쥐약을 많이 팔러 다녔는데, 우리 어릴 적에 보면 꽹과리 같은 걸 치고 다녔어요. 그러고 ‘옥단어’가 있는데, 직업은 떠돌이 날품팔이입니다. 물장수예요. 목포 시내로 말하면 유달산이 악산(惡山)이고 해서 특히 물이 귀했다고 합니다. 동네마다 공동 수도간이 있어서 그 수돗물을 받았다고 합니다. 물값을 몇 푼 주고 수도꼭지를 열어 주면 그 물을 물지게에 받아서 남의 집에 팔고 다녔습니다. 이 옥단이는 여자가 힘이 장사였습니다. 그녀는 목포 태생 사람도 아니고 어디서 흘러들어온 사람인지 그 누구도 몰랐습니다. 말도 좀 더듬고, 살도 찌고, 약간 사팔뜨기이기도 했는데, 대소가 잔칫집에는 으례껏 옥단이가 있었다고 합니다. 물도 길어다 주고 허드레 일도 해야 하니까요. 생일이나 환갑잔치가 있으면 물을 채워야 하고, 또 거기서 잔심부름도 하고, 한쪽 작은 뒷방에서 새우잠도 자야 하고. 이런 인물 옥단이를 가지고 차 선생이 작품을 쓰신 건데, 여기서 전개되는 모든 사건과 내용은 전적으로 픽션입니다. 그런 여자 인물이 있었고 그랬었다는 정도지, 이 불행한 여자의 실제 역사는 절대로 아닙니다. 이 작품에 묘사된 이른바 “사건”은 어디까지나 작가적 상상력이자 창작[虛構]이라고 말씀하면서, 그 작의(作意)와 주제를 다음과 같이 천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장 어렵게 살았던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의 폭풍 같은 세월 속에서 살아나온 옥단의 삶의 궤적은 곧 우리 현대사의 뒷골목 풍경이기도 하다. 한 무지몽매한 여인이 시달려 살았던 현실은 그대로 우리의 역사이자 시대의 반영일진대, 이 작품은 단순한 연극이 아닌 우리의 현대사와 그 아픔을 되돌아보자는 데다 그 의미를 두고 있다. 󰡒옥단어!󰡓 하고 모두가 천대했던 한 여인의 생애를 통해 우리의 어두웠던 시대에 대한 진혼이기도 하다. 천대받으면서도 끈질기게 버티며, 남을 위해 베풀다가 길지 않은 생애를 마친 불행한 여인 옥단은 우리 민족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시대상황을 살펴보면 1938년부터 8 · 15광복을 거쳐 6․25 나던 해 초여름까지 시간을 잡았거든요. 사실 1930년대부터 국권회복과 해방공간, 그리고 5년 뒤의 한국전쟁 기간은 가장 격동적이고 어두운 세월이었습니다. 1931년에 그 유명한 만주사변이 일어납니다. 만선철도를 왜군들이 은밀히 계획적으로 폭파시켜 놓고는 중국군 소행이라고 트집을 잡아서 일으킨 전쟁이 만주사변입니다. 제가 일본을 폄훼하려고 지어 낸 말이 아닙니다. 만주사변 일으키고 나서 1937년 7월 17일은 마침내 중․일전쟁이 발발합니다. 북경 저쪽으로 가면 금나라 때인가 세운 다리가 지금도 있습니다. ‘마르코폴로 다리’라고도 합니다. 그 노구교(蘆溝橋)를 건너서 또 일방적으로 공격을 한 게 일본군이예요. 제국주의 침략전쟁이란 것은 그렇게 치사하고 황당하고 무섭습니다. 두만강 하구에 가면 훈춘이라고 있는데, 거기에 ‘일안망삼국’(一眼望三國)이라고 하는 망해각(望海閣)이 있습니다. ‘한 눈으로 3국, 세 나라를 바라본다.’ 그 망해각에서 주위 사방을 둘러보면 강 건너 오른쪽은 북한 땅이고, 왼쪽으로 멀리 내려다보면 거기는 러시아 땅이고, 내가 서 있는 여기는 중국 땅입니다. 세 나라의 닭 울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를 죄다 들을 수 있는 곳이랍니다. 거기에 장고봉(長鼓峯)이라고 하는 러시아의 산언덕이 한 개 있습니다. 그 사건도 1938년에 일어난 일인데, 거기선 또 어떻게 러시아군(軍)과 전투를 하게 되었느냐 하면, 어느 밤중에 몰래 일본군이 장고봉으로 넘어가서 러시아의 군사시설 사진을 찍은 거예요. 일종의 첩보전이죠. 발각되었을 것 아닙니까. 해서 러시아군이 총격을 가하니까 왜군 병사 한 놈이 총 맞아 죽었어요. 일본군이 그걸 트집잡아서 다짜고짜 막 쳐들어가서 그 장고봉을 무단 점령해 버렸습니다. ‘러일전투’가 벌어진 겁니다. 그래서 13일 동안의 쌍방교전이 크게 벌어졌는데, 무려 6천 명의 사상자가 났다고 합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저지른 무도하고 악랄한 침략전쟁인 것입니다.
차 선생이 1938년을 연극의 ‘시기’로 설정한 것은 가장 힘들고 어두었던 때입니다. 곧 중․일전쟁이 터져서 학병도 가야 되고, 징용도 가야 되고, 심지어 놋수저와 놋그릇, 놋요강까지도 깡그리 공출로 전쟁터에 바쳐야 하는 그런 시절을 시작으로 잡은 거죠. 스토리는 이렇게 전개됩니다. 옥단이라고 하는 지게꾼 날품팔이가 있습니다. 부잣집을 전전하는 사람입니다. 작품의 주무대는 이참봉 댁입니다. 연극이 시작되면 물을 긷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게 1장입니다. 플롯은 모두 10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내일 와서 이참봉 댁 물 좀 채워라. 무슨 일입니까? 이참봉 댁 딸 영숙이가 나주의 어떤 집안 아들하고 맞선을 보는 날인데 잔치를 벌이는 모양이다.󰡑 드라마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이참봉 댁에는 영찬이라는 외아들이 동경에서 유학하고 있는데, 그가 본인의 친구를 자기 여동생한테 소개를 한 거죠. 그래서 혼인이 이루어졌습니다. 줄거리의 핵심은 그렇습니다. 이참봉은 전쟁 중에 국민총력연맹 목포지부장이고, 도의회 의원이라 막강한 파워를 갖고 있습니다. 강제징병이 시작되니까 이광수와 최남선 같은 명사들이 일본 동경에 가서 한국 유학생들을 모아놓고 연설을 합니다. 이 와중에 사위자식이 이참봉 장인을 찾아와 가지고 학병(學兵)에서 자기를 좀 빼 달라고 조릅니다. 이참봉은 내가 지금 어떤 위치인데 그런 부탁을 들어 줄 수 있겠느냐며 거절합니다. 그러자 딸 영숙이가 영찬이 오라버니는 몰래 빼돌리면서 자기 사위자식은 징병에 보내려 한다면서 울며 항의합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나는 그 아들놈이 3백 원을 급히 보내 달라고 해서 돈 부쳐 준 것밖에 알고 있는 사실이 없다는 것. 이런 사단에 순수한 옥단이가 끼어듭니다. 왜 그러냐 하면, 궂은 일 많이 하고, 그 집안에 자주 드나들다 보니까, 사위와 딸과 이참봉 어른이 어우러져 싸우고 있거든요. 옥단이가 보기엔 싸우고 다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참봉이 빼돌렸다는 영찬 도련님은 바닷가 움막인 옥단어의 집에 숨어 있었던 것. 영찬이 학생은 옥단에게 자기가 그곳에 피신해 있다는 말을 밖에 나가서 하면 안 된다고 당부했지만, 그들이 하도 심하게 다투고 하니까 옥단이는 자기의 집에 영찬 도련님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토설해 버립니다. 이로 인해 영찬이는 결국 경찰서에 끌려가는 신세가 됩니다. 영찬이가 고문을 당하고 그러는데, ‘학병 지원서’를 쓰라는 강요를 영찬이는 단호히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영찬이는 주장합니다. 나는 무정부주의 사상가로서 일본군에는 결단코 지원할 수 없다. 절대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러자 경찰은 뜻밖에도 옥단이를 등장시킵니다. 네가 나의 말에 수긍하지 않는다고 해서 학병지원이 안되는 줄 아느냐고 하면서. 그사이 옥단이는 죽도록 고문을 당한 끝에 만신창이가 된 것입니다. 아주 맛이 갔어요. 얼마나 고문을 당했는지, 영찬이가 바라봤을 때 그 처참하고 가련한 것이 기도 안 차거든요. 보아라! 불쌍한 옥단이를 살리고 싶다면 니놈이 ‘학병 지원서’에 도장을 찍으라고. 그러고 거기에 한 꼬투리가 더 붙습니다. 바닷가 움막집에서 함께 살았으니까 옥단이 네년은 영찬이 학생하고 그렇고 그런 사이 아니냐, 그러면서 온갖 모욕과 험담을 뒤집어씌우는 것이죠. 영찬이 학생은 지원서를 쓸 테니까 옥단이를 더 이상 손대지 말고 석방시켜 달라며 굴복하게 됩니다. 그리고 8 · 15광복을 맞이합니다. 이참봉 댁은 그로부터 몰락의 길에 접어들죠. 그가 친일파 노릇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죄가 무겁잖습니까? 또 민족해방 직후 온 나라가 좌우의 이념갈등과 사회적 혼란으로 빠져들죠. 이 시기에 치안대, 여기서는 남로당 치안대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이 고대광실, 이참봉 집까지 몰수를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참봉은 홧병으로 죽고, 영찬이는 자살을 해 버렸고, 사위는 군대에 가서 전사하게 되었고, 하루아침에 온 집안이 쑥대밭 되는 몰락의 비극이 옵니다. 옥단이는 그런 시대상황을 제대로 인식할 리 없지요. 게다가 이미 정신이 왔다갔다 하는 실성의 처지이고요. 드라마의 프롯과 전개란 대개가 그렇습니다만 물지게의 공동수돗가에서 시작했으니까 라스트 씬에 가면 다시금 그 장면이 나오죠. 옥단이가 수돗가에 물지게를 지고 찾아왔으나, 이미 시대는 바뀌어서 수도 꼭지가 집집마다 다 들어오고 물을 사 먹는 집이 없습니다. 그사이 많은 세월이 흘러갔고, 50년대가 되니까 누구 하나 아는 사람도 없어요. 뚱뚱하고 나이도 먹었고 정신도 모자라고. 그러니까 어느 누구도 사람 취급을 하지 않고 거들떠보지도 않아요. 옥단이의 또 하나 특기라면 하모니카를 잘 부는 게 재능이었는데, 그 하모니카도 영찬이 학생이 사 준 걸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그녀는 하모니카를 불면서 눈 내리는 날 춤추다가 굴러 떨어져 죽습니다. 족보가 있습니까, 주민증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으니까 경찰에서는 행려사망자로 처리해서 묻어 줘야 했습니다. 대단원의 마지막 9장, 10장에 가면 일꾼들이 리어카에다 사체를 거적으로 덮어서 산으로 묻으러 나갑니다. 그런데 매서운 겨울 날씨에 하도 추우니까 일꾼들이 주막에 들러서 막걸리 한 대접을 마시고 돌아다보니까 리어카와 사체가 감쪽같이 없어졌어요. 큰 소동이 벌어진 거죠. 과연 어느 누구의 소행인가? 그 다음 장으로 넘어가면 경찰서 주재소가 나오는데 무슨 일이 벌어졌느냐 하면, 못 먹고 못 사는 시절이라서 리어카에 둥그렇게 거적이 덮여 있고 거기에 눈까지 희게 쌓여 있으니까 이것을 쌀가마니인 줄로 지레 짐작하고는, 진도에서 목포에 유학 온 고등학생 두 명이 끌어다가 쌀집 가게로 갔어요. 해서 그걸 팔려고 들쳐보니 죽은 사체가 나온 겁니다. 두 명의 고등학생이 붙잡혀서 주재소에 오게 됩니다. 작가가 왜 그렇게 설정을 했는가 생각해 보니까, 리얼리즘 문학이라고는 하지만 꼭 현실적이기만 하지는 않거든요. 초현실적인 판타지로 끌어올리는 것도 좋은 하나의 방법과 전략입니다. 경찰관이 두 학생한테 말합니다. 너희들은 죄를 지었으니까 감옥에 가야 하는데, 감옥 가기 싫으면 보호자인 아버님을 오시라고 해라. 해서, 훌륭하고 멋지게 “꽃상여”를 만들어서 장례를 치르도록 명령하는 것입니다. 대단원이 아름답게 잘 마무리되었습니다. 차 선생님은 좋은 작품을 남기셨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의 한국연극 100주년이 2008년이었습니다. 그것을 기념해서 작년에 한국연극협회에서 『인물연극사 한국현대연극 100년』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김향이라는 분이 연세대에서 차범석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그래서 필자가 된 모양입니다.
차범석의 작품 주제는 한결같이, 현대사의 질곡과 인간 심연의 욕망의 문제라는 두 가지의 큰 축을 천착하면서 발전해 왔다. -- 차범석은 극작가로서 평생 작품을 쓰고 공연을 올리는 일에 몰두하며 좀더 관객에게 다가갈 수 있는 작품, 관객과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는 작품을 쓰기 위해 노력한 극작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쉼없이 한국 연극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모색했던 󰡐한국 현대극의 거목󰡑이었다. (김향, 「차범석―현대극의 거목」, 『인물연극사 한국현대연극 100년』, 한국연극협회, 2009)
차범석 선생은 2006년에 귀천하셨습니다. 선생님을 기리는 두 가지 사업이 있어요. 지난 2007년에 차범석문학관을 목포에 마련했습니다. 목포에는 문학분야의 큰 어른이 세 분 계시는데 김우진, 박화성, 차범석 등입니다. 이 세 분들은 목포가 낳은 걸출한 어른이어서 목포시에서는 푸른 바닷가에 그들을 기리는 문학관을 신축했습니다. “목포문학관”이라 해서 1층에는 자료가 제일 많은 차범석 선생이 차지하고, 2층에는 박화성 선생과 김우진 선생의 전시실이 있습니다. 아주 잘 꾸며 놓았습니다. 거기엔 또 조그마한 소극장도 하나 있어요. 그래서 이 세 분의 작품들을 목포 연극인들이 한 편씩 공연하기로 했답니다. 작년에는 <그 여자의 작은 행복론>을 공연했고, 올해는 <바람 분다 문 열어라>라는 작품이 공연작이었습니다. 또 하나 서울에서는 “차범석연극재단”이 생겨났습니다. 조선일보와 공동 주최가 되어서 해마다 ‘차범석희곡상’을 시상하고 있습니다. 대단히 파격적이죠. 당선작 일금 3천만을 걸고 해서 작년 겨울까지 3회를 치렀는데, 한 번은 당선작이 없었고, 작년에는 당선작이 나왔습니다. 차범석연극재단은 사모님이 살던 아파트를 팔고, 아드님이 보태서 기금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는데, 요즘은 은행 이자율이 낮아서 운영이 힘들다고 합니다. 당신의 저서로는 희곡집 8권, 연극이론서가 2권, 수필집 3권, 자서전 1권이 있습니다. 제가 처음에 말씀드린 대로 이 『옥단어』희곡집의 ‘머리말󰡑중에서 끝구절을 인용하고 오늘의 얘기를 마치는 걸로 하겠습니다.
내가 어느 새 팔십 고개에 올라섰다. 나는 지금까지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살아왔다. 나이 들었다고 거만 떨지도 않고, 허세 부리지도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 살아간다는 신조를 품고 살았는데 어느덧 팔십이라는 숫자가 강박감을 주는 것만 같다. …… 나는 욕심 많게 오래 살며 노추(老醜)를 나타내는 것보다야 어느 날 조용히 잠자듯이 갔으면 좋겠다고 아내와 마주앉으면 털어놓는다. 그러면서도 아직도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마음 속으로 셈을 하는 염치없는 사람이다. 미련 없이 살았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은혜를 입었고, 하고 싶은 일 다 했으니 또 무엇을 바라겠는가 하면서도 역시 조금은 더 살고 싶다는 생각은 지울 수가 없다. 2003년 11월 차범석
내 이야기를 끝내겠습니다.
토론광장 질문_ 제가 개인적으로 차범석 선생님을 가까이서 모신 적이 있었는데요. 1973년인가 제가 『한국문학』에 재직할 때 <약산의 진달래>라는 작품을 조판해서 실은 적이 있습니다. 차범석 선생이 워낙 대가여서 이름자를 좀 크게 해 드릴려고, 이름자를 바꾸라는 표시를 해 두었습니다. 그때는 활자 인쇄를 할 때 거든요. 인쇄소에 가서 제본이 막 끝난 책을 보니까 차 선생님의 이름이 아예 없어졌어요. 작은 글자를 빼고 큰 글자로 갈아 넣어야 되는데, 빼기만 하고 다시 집어넣지를 않은 거예요. 그렇다고 다시 인쇄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 큰 활자 이름을 한데 묶어서 2만 권인가 하는 책에다 일일이 손으로 찍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하나만으로도 저는 차범석 선생님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건 그렇고,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아까 차범석 선생도 관객과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는 작품을 쓰기 위해 노력한 작가였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희곡은 예로부터 공연을 하지 않아도 문학작품으로 남아 왔습니다. 시나리오나 방송극본은 그렇지 않거든요. 영화나 드라마가 되어야 완성됩니다. 그런 점에서 희곡과 방송극본의 차이가 납니다. 그렇다면 희곡의 경우 꼭 공연을 근저에 깔고 창작해도 되는 것이 아닌지요?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답변_ 시, 소설, 아동문학 같은 문학 장르는 활자를 통해서 완성이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희곡문학도 때로는 그 범주에 들기는 합니다만, 그러나 희곡은 활자화에 그치지 않고 무대에 올려 공연을 함으로써 그 작품의 완성도가 끝난다고 대개 알고 있거든요. 또 그렇게 평가들을 합니다. 다시 말씀해서 희곡은 무대에 올라서 공연이 되어야만 비로소 그 생명을 다하고 완성된다고 보면 됩니다. 물론 공연을 하지 못했다고 희곡이 아니라는 건 아닙니다. 그런데 희곡 같은 경우는 원고가 여러 벌이 나와요. 막상 내가 써서 연극으로 올리면 연출가가 고쳐라, 이건 맞지 않다, 뭐다 해서 언쟁이 붙곤 해요. 저도 그런 경험이 많습니다. 수년 전 일인데, 「극단 산울림」의 임영웅 선생이 제 작품을 연출하셨습니다. 한데 그 작품의 한 장면을 굳이 빼자는 거예요. 통째로, 그냥. 연출자 본인이 봤을 때는 맞지 않다는 거예요. 원작자로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약이 올라서 안 된다 했더니, 당신은 빼야 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거예요.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임 선생은 그 씨인을 빼고 공연을 하였고, 저는 나중에 저는 제 희곡집에서는 그 씨인을 다시 살려서 간행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꼭 희곡이 된다, 안 된다 하는 건 아니고 희곡의 특성상 기왕지사 무대공연까지 가야만 무엇인가 완성이 되고, 그 작품도 끝나는 걸로 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