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南山드라마센타’(그 때의 표기는 ‘터’ 아닌 ‘타’였음)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64년도 하반기였으니까 지금으로부터 半世紀, 꼬박 50년 세월을 亘한다. 때에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로 연극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는 얼치기 생각으로, 무엄하게도(?) 『드라마센타演劇아카데미』의 ‘극작반’에 버젓이 입학하게 된 것. 그도 그럴 것이 입학시험의 필기고사 문제 중에 ‘五廣大’가 있었는데, 듣는 이 처음이라서 아무렇게나 그냥 ‘딴따라 광대배우 다섯 사람’을 일컫는다고 적어놓았으니 그런 賢問愚答이 어디 있었으랴! 그 ‘오광대’란 경상남도 통영 지방에서 지금껏 전해 내려오는 탈놀음이란 사실은 훗날에 가서야 배우게 된 것. -- 나의 대학시절은 50년대 자유당 정권의 독재와 부정부패 시기로서 이른바 ‘4.19세대’이다. 우리는 학창 때에 이미 ‘4월민주혁명’과 ‘5.16군사혁명’(군사쿠데타)을 겪었다. 그 혼돈과 불안의 시기에 나는 대학(경희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후 고향(전라북도 南原)으로 낙향해서, 하릴없이 룸펜 생활 2년여를 지내는 중에 우연찮게 신문광고를 한 개 보게 되었다. 그것은 곧 남산드라센타란 곳에서 아카데미 학생모집이 있다는 것. 드라마센타란 뜻도 모르는 주제에 무조건 보따리부터 싸들고 다시금 상경하여 남산쪽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것은 왠고하니 대학교의 재학생 시절에 문학 미술 음악 등등 예술분야의 『文化賞』이라는 장학제도가 있었는데, 내가 우연찮게 ‘장막희곡’을 써서 응모한 것이 ‘당선작’으로 연결돼서 그해의 1년 동안 자그만치 두 학기 등록금을 전액 면제받은 과거 경력이 있었던 터이다. 바야흐로 그것이야말로 경제과 출신 노경식 개인과, 위대한 연극예술과의 얄궂고 기구한 인연이요 운명이라면 운명이었던 셈이다. 앞선 이야기는 이쯤 각설하고, 아카데미 학생생활은 훌륭한 선생님들(동랑 유치진 소장, 이원경 연출가, 오사량 교수 등) 밑에서 비교적 자유스럽고 따뜻하고 친절한 배움을 얻었다는 기억들이다. 물론 예술이란 장르가 그처럼 딱딱하고 엄격하고 부자유스런 것만은 아닐 테니까. 게다가 우리 극작반의 좋은 친구들을 여럿이나 새롭게 사귈 수도 있어서 -- 남산드라마센타의 겨울 한철은 참으로 춥다. 대극장의 지하방에 이곳저곳 널려 있는 ‘敎室’(강의실)이란 것이 얼마나 춥던지, 양손은 호호 오그라들고, 두 다리와 사타구니는 벌벌 떨리고, 입김은 연무가 되어 유리창에 하얗게 성에가 낄 정도이다. 물론 톱밥이나 연탄난로가 한 개씩 놓여있었다고 쳐도, 그것의 화력이란 아니할 말로 ‘죽은 놈의 콧김’만큼도 못된다. 그 시절의 영하 18도, 20도의 맹추위는 지금과는 비교도 아니되고, 그 시절에 걸치는 우리들의 옷가지 입성이란 것이 얼마나 가난하고 허술한가? 오늘날처럼 푹신푹신한 오리털 ‘덕다운, 패드’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 우리는 겨울의 드라마센타를 ‘동토의 땅, 툰드라’(tundra)라고 이름불렀다. 러시아의 꽁꽁 얼어붙은 시베리아 땅이나 알래스카 같은 寒帶地方 -- 그렇다고 해서 안을 들여다보면 드라마센타 같은 훌륭한 극장건물에 최신식 난방시설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난방을 돌리고 가동하려 해도 운전할 기름값과 비용이 없었다. 왜냐면 드라마센타는 개관하고 나서 불과 얼마 아니되어 금새 경제적 운영난에 봉착하게 되었던 것. 그러므로 그 운영난 타개와 극복을 위해 집 앞의 새 건물을 지어서 『드라마센타예식장』으로 임대 하는 등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가슴 아픈 툰드라의 땅, 南山드라마센타여!
1. ‘신문문예축하공연’
이듬해, 196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희곡 <철새>가 당선되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 아카데미 극작실습 시간에 쓴 작품을 다시금 손질하고 해서 음모한 것이 뜻밖에도 데뷔의 영예를 가져왔다. 그러고 보니까 나 노경식이가 드라마센타 출신 ‘희곡작가 제1호’가 된 셈이다. 드라마센타 개관 이후 첫 번째의 영광! 그런데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좋은 일 하나가 더 생겨 일어났다. 드라마센타와 경향신문사 동아일보사 서울신문사 등 세 신문사가 공동주최가 돼서 ‘신문문예 희곡축하공연’을 대극장에서 올린다는 것. 지금까지는 신춘문예 희곡작품을 연극무대에 올린다는 일을 단 한 차례도 없었던 새로운 시도였다. 소설이나 시 당선작처럼 그냥 신문지상에 활자화시켜 발표하는 것이 고작일 뿐. 그런데 후일담으로 나중에 들은 얘기는 이것이야말로 동랑 유치진 선생의 멋진 굿아이디어. 희곡문학이란 어디까지나 그 무대형상화가 최종 목표이자 생명이라는 생각을 잘 알고 있는 선생께서는 그런 참뜻을 세 신문사마다 찾아가서 누누이 잘 설득하고 후원을 부탁했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은 이원경 선생의 글(연출자의 辯)에서도 나타나 있다. “이러한 그야말로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세대교체를 부르짖는 요즘 세상에서 아이로니컬하게도 이미 노년기에 드신 백발이 성성한 ‘드라마센타 할아버지’의 머리에서 솟아나왔다. (註 : ’드라마센타 할아버지‘는 柳致眞 所長) --”
1965년 新春文藝當選 祝賀公演 경향신문 <聖夜> 오혜령 작/ 유치진 연출 동아일보 <飛行場 옆 慈善病院> 하경자 작/ 김경옥 연출 서울신문 <철새> 노경식 작/ 이원경 연출
그리하여 그해 1월 25, 26, 27, 28일 (낮 3시, 밤 7시)까지 매회 3편씩 한꺼번에 동시공연함으로써, 총 4일간의 8회 공연은 큰 성황을 이루고 대성공을 거두었다. 여기에 덧붙여 동랑 선생은 신춘문예의 등단작가를 아껴서 “새 극작가 캐내기의 해”라는 타이틀을 붙여서 그 장래와 용기를 북돋아주기도 하였다.
<철새> 당선소감 : 살며시 웃어주소서 그저 寒冬에 藥水를 마신 것처럼 얼얼하다. 감사할 뿐이다. ‘케이프케네디’ 우주공항의 발사대는 콘크리트보다 더 견고한 어떤 물질로 地下 수십 척의 기초공사 위에 서 있다고 한다. 나에겐 그 정도는 말고 한 치의 뜀틀이 있어야만 했다. 진구렁 위에서 용쓸 수는 없을 것이니말이다. 개구리도 뒷다리에 힘을 주고 한 번은 움츠린다. 그가 어디까지 뜀박질할 수 있을까는 그 다음의 문제에 속하는 일이고 ---- 이제서야 겨우 꼬리 떨어진 내 새끼개구리가 뭍에 올라 다리를 움츠리고 발돋움 한번 해볼테다. 圭魯 大兄님, 당신이 데린 그날의 서울市外 드라이브가 아니었다면 오늘의 이 같은 픽션은 없었을 것입니다. 늘 나를 아끼는 어른 및 친우들에게 감사합니다. 끝으로 이 拙稿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읽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의 노고에 고마운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자식을 그저 보람으로 알고, 그 숱한 日月을 살아오시는 고향의 할머니, 어머님! ---- 살며시 한번쯤 웃어주소서.
이와 같이 南山드라마센타 주최의 ‘신춘문예축하공연’은 해마다 그해 봄 시즌의 최대 연극행사로서 자리매김되고, 우리 연극계의 값진 문화축제로서 뻗어나갔다. 그 이후로 연년이 촉망받는 수많은 신인작가들이 배출되었음은 우리가 익히 아는 일. 오재호 오태석 전진호 윤대성 등등 --
2. 이삭줍기 <아리랑 고개>
내 작품 <철새>에는 깜짝 놀랠 일로 원로배우 全玉 선생이 출연하시게 되었다. 전옥 선생은 온 세상이 다 아는 왕년의 명배우 “눈물의 여왕 전옥“ 그 어른이다. 전옥은 ‘빠 마담’ 역할. 나 같은 햇병아리야 한쪽 귀퉁이에서 숨을 죽일 밖에. 그런데 어느 날 ‘드라마센타 할아버지’께서 부르시었다. “盧君, 마침 잘되었다. 시방 전옥 선생이 <철새>에 출연하기로 하고 연습중이지?” “예, 선생님.” “전 선생한테 내가 이야기해 놓을 테니까, 노군은 시간 내서 전 선생이 기억하고 있는 옛날 대사들을 하나하나 받아 적어요. 그건 일제 때의 연극 <아리랑 고개>란 작품이다. 그때의 여자 주인공이 전옥씨였으니까 말야. 나운규의 유명한 영화 <아리랑> 아니고, 연극에도 <아리랑>이란 작품이 있었어. 공전의 히트작이었지 --” 사연인 즉슨, 옛날 1930년대의 일제 때 연극 <아리랑 고개>를 복원해 보라는 지령(?)이었다. 연극 <아리랑 고개>는 극단 土月會의 성공작으로 春崗 朴勝喜 작/ 朴珍 선생이 연출한 작품이다. 어느 날 작가와 연출 두 사람이 술집의 옆방에서 부르는 아리랑 타령,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문전옥답 다 버리고 쪽박신세가 웬말이냐’ 하는 노래를 듣고 착상을 얻었다는 것이다. 줄거리는 한 마을에 사는 총각 길용이와 처녀 봉이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인데, 길용이네 집이 門前玉畓 땅을 왜놈에게 빼앗기고 멀리 북간도로 정처없이 이민 떠난다는 눈물겨운 이야기. 연극은 극장마다 울음바다를 이루고 초만원이었다. 그런데 공전의 이 히트작은 때에 광주학생만세사건과 연루되어 “공연중지” 딱지를 받았다는 사실을 『세세연년』(박진 회고록)에서 알게 되었다. 처음 초연 때 여주인공은 石金星, 2회 때 전옥. 나는 전옥 선생과 박진 선생을 각자 모시고 많은 말씀을 들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전 이야기라서 희미한 대로 대충 줄거리와 인물들을 엮어서 나름대로 작품을 재구성하고, 그 원고를 ‘남산 할아버지’한테 가져다 드렸다. 때에 동랑 선생은 ITI(국제극예술협회) 한국본부 위원장을 맡고 있었는데, 해마다 3월 27일이 「세계연극의 날」이다. 그날은 각국 위원회에서 저마다 기념행사를 갖게 된다. 세계연극의 날 ’메시지‘를 낭독하고, 간단한 연극을 공연하는 등등. 그래서 그날 행사의 일환으로 토월회 박승희 선생의 <아리랑 고개>를 추억하신 모양이었다. 그런데 막상 그날의 기념식에 나도 참석차 드라마센타 대극장에 올라가 보니 영 딴판이었다. 박승희 선생의 작품은 작품인데, <아리랑 고개>가 아닌 뜬금없이 듣도 보도 못한 <이 대감 망할 대감>이란 엉뚱한 작품이 아닌가! 내용을 보자니까 제주섬의 전설 <배비장전>을 각색한 것이었다. 나는 나름대로 조금은 화도 나고 매우 섭섭할 밖에. 얼마 후에 동랑 ‘할아버지’가 미소를 머금고 하신 말씀. “노군, 작품 읽어봤는데 잘 구성했더라. 애 많이 썼어요. 그런데 춘강 선생이 손수 집필한 <이 대감 망할 대감>이 우연하게 발견됐어요. 그래도 재구성보다는 직접 쓰신 작품이 더 어울리지 않아? 의의도 있고, 허허 --” 그러고 보니까 이래저래 내가 재구성했던 그 ‘원고’ 역시도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산실되고 찾을 길 없구나.
끝으로 嗜村 여석기 선생이 지도하신 『한국극작워크숍』의 이야기가 떠오르나, 그 분야는 다른 분에게 맡끼고 여기서 그치기로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