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가 나에게 청탁한 글 제목은 ‘극작가쪽에서 본 한상철 평론가’ 정도였든 것 같다. 허나 내가 본 연극평론가 한 아무개 하고 중언부언 어줍짢게 논하는 대신으로, 한 교수와 내가 한국연극의 길에서 함께 살아온 연극인생을 되돌아보는 것이 한결 도움이 되라는 생각에서 이쯤하여 글빚을 가름하기로 한다.
나와 한 선생이 서로 면식을 갖게 된 것은 대략 1960년대 말께일 것이다. 그때쯤 나는 희곡작가로서 막 데뷔한 올챙이 시절이었는데, 한상철은 영미희곡의 번역자로서 <사계절의 사나이>(Robert Bolt), <천사여 고향을 보라>(Thomas Wolfe) 같은 주옥 같은 현대작품을 번역 소개하여 명동국립극장에 올리면서 연극평론가의 길을 가고 있는 30대의 팔팔한 연극인이었다. 그래서 나는 영어실력이 얼마나 좋으면 저렇게 멋진 번역을 해낼 수 있을까 하고 푸념하듯이 선망의 념으로 그를 바라보기도 한 적이 있었다. 그런 한상철을 먼 발치에서 오며가며 인사 정도를 나누면서 지내오다가 정식으로 정작 알게 된 것은 여석기 선생을 통해서였다. 때에 여선생님은 어느 누구의 아무런 도움도 없이 순전히 사전(私錢)을 들여서『연극평론』(지금의「연극평론」전신)을 창간하게 되었는데, 한상철은 편집주간으로, 노경식은 편집위원으로 참여하게 된 인연이 그것이다. 내가 그 말석에 끼이게 된 동기는 그 무슨 연극실력이 대단해서가 아니고, 때에 나는 아무개 출판사의 편집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던 터라 잡지 출판의 그 모든 실무를, 가령 잡지의 편집 레이아웃이라든가 맞춤법 교정 및 제작과 인쇄소 교섭 등을 도맡기 위해서 차출된(?) 셈이었다. 어쨌거나 그 시절 이후부터 우리들 두 사람 사이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쇠 심줄 같은 질긴 인연’으로 자연스럽게 연극 한세상을 살아왔다. 때로는 여선생님을 모시고 무교동이나 명동 대폿집이라든지, 아니면 편집회의를 한답시고 불광동의 여선생 댁에서 사모님의 그 멋진 음식 솜씨를 맛보면서 통금시각이 아슬아슬하도록 늦게까지 술잔도 기울이며. 그리고 여선생이 창설한「한국극작워크숍」의 3, 4기 때는 한 선생과 둘이서 지도교수를 함께 맡기도 하였다. (본인은 ‘한국극작워크숍’의 1기 동인임)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반세기에 긍하는 세월을 연극과 함께 살아온 것이다. 나의 따뜻하고 은근하고 존경하는 연극동지이자 평론가 한상철이 엊그제(향년 73세) 그렇게도 허망하게 이승을 등질 줄은 상상하지도 못한 채 시방 오늘날까지 -- 감은 익은 감도 떨어지고 생감도 떨어진다는 속언도 있으나, 우리의 한 교수가 그렇게 빨리 우리 곁을 떠날 줄이야 짐작이나 했겠는가. 그러니까 지난 3월 달에 한상철 선생이 졸도하기 전전날-- 그날은 금요일(6일)이었고 한 선생은 이틀 뒤 일요일(8일)의 산책중에 쓰러졌다-- 에도 우리는 서로 전화를 하곤 하였다. 그것은 바로 월요일 오후엔 대학로에서 여럿이 만나서 ‘대포 한잔씩’을 나누기로 약속한 것. 한 교수는 물론 ‘좋습니다. 그래요, 나갈게. 허허.’ 하고 전화선 너머에서 다정하게 웃었다. 그런데 정작 월요일 아침엔 생각지도 않게 사모님의 핸드폰 전화가 있었다. 갑자기 몸이 아파서 병원에 그냥 입원해 있으까 오늘은 약속을 못지킬 것 같노라고. 자세한 아무런 설명도 없었으니 그처럼 중상인 줄을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또 어딘가 편찮으려니 했다. 한 선생은 본래 수년 전에 뇌졸중으로 한번 쓰러졌다가 많이 회복되고 있었으니까. 그날의 약속이란 별것도 아닌 ‘술판’ 약속이었다. 새로 문을 열게 된 명동예술극장의 극장장 자리에 구자흥이 발령 받아서 그 축하모임으로 핑계삼아 마련된 술자리였다. 물론 ‘한턱 쏘는’ 호스트는 구자흥 본인이고, 장소는 지금은 없어진 ‘오감도’의 3층 방. 해서 백성희 선생과 윤대성 권성덕 유용환 박계배 노경식 등등 약속한 10여 명이 모두 참석했는데 유독 한 교수만 빠져서, ‘한선생은 몸이 좀 아파서 병원에 갔다는데요?’ 하고 가볍게 넘기고 말았다. 그런데 그 병세란 것이 그렇게도 치명적인 ‘뇌진탕’이었으며, 끝내는 5개월여의 투병 끝에 회복하지 못하고 연극인 곁을 떠나고 말았으니, 오호 통재라, 얼마나 안타깝고 슬프고 절통한 일인가!
한상철 교수는 갈데 없는 남산골의 “딸깍발이 샌님” 격이다. 대국어학자 일석(一石 李熙昇) 선생의 설명에 의하면, 딸깍발이란 옛날에 서울의 한적한 남산골에 살면서 아직은 과거에도 급제하지 못한 ‘꼬장꼬장하고 가난한 선비’를 일컫는 말이다. 우리 한 교수야말로 태생이 서울인데다가 그 짧달막한 키에 미소년처럼 고운 얼굴 생김새, 생각하고 움직이는 행동거조 또한 말수 적고 안존하고 목소리도 조용조용하며, 언제나 편안하게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산다. 그러나 감히 쉽사리 넘볼 수 없는 꼬장꼬장하고 깐깐한 몸가짐을 지니고 있으니 천상 “딸깍발이 샌님”일밖에. 한상철의 연극평론에 관한 자세와 관념 또한 이와 다를 바 없었다. 작년에 그의 평론집(『현대극의 상황과 한국연극』, 2008) 출판기념회 때-- 그 모임도 평소에 가까운 연극인 친지 몇 사람만의 조촐한 자리-- 연출가 임영웅이 말씀한 대로, 모르면 몰라도 한상철은 한번도 ‘주례사 비평’ 같은 너절한 짓(?)을 한 적은 없었을 것이다. 연극작품이 마음에 안들고 좋지 않으면 그것으로 그만이지, 무슨 인사 치례나 체면상 마지 못해 칭찬하거나 하는, 결혼식장의 신랑신부 추켜세우는 주례사 같은 낯 간지러운 평설은 내놓치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러다 보니까 섭섭한 평을 받은 어느 연출가와는 전화질로 대거리를 받은 적도 심심찮게 있었다는 소문도 들었다. 그러고 가령 웬만큼 친하다는 나같은 경우도 작품이 마음속에 차지 않으면 그것만으로 외면하고 마는 것. 그러니까 당해 작품에 ‘악평’을 차마 쓸 수는 없고 모른 체 그냥 넘어가 주는 것이 한상철 평론가의 최대의 선심(?)과 아량이 아니었을까? 일찍이 나는 그에게서 크게 은고(恩顧)를 받은 바 있었다. 노경식 작품론 <시대상황과 민중적 삶의 관계추적>(『한국현역극작가론 1』, 1987)이 바로 그것인데, 그 글은 장문의 본격논문으로 지금까지도 한상철의 우수논문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한다.
1980년대 초반의 4, 5년 동안 여석기 선생님과 한상철 교수 나, 세 사람은 해마다 여름휴가를 함께 즐긴 일이 있었다. 그때는 해마다 여름이면 무슨 ‘바캉스’라는 말이 유행가처럼 소란을 피운 적이 있었는데, 우리도 그런 영향을 받은 셈이라고나 할까. 어쨌거나 여선생님의 뜬금없는(?) 제안으로 그 여름 여행이 이뤄지게 된 것. 여선생님을 모시고 우리네 셋은 여름휴가를 떠나게 되었는데 일정은 3박 4일 정도. 행선지도 대개 한 해는 동해안쪽이고, 그러고 이듬해 여름에는 남해안으로 떠난다. 딱히 목적지를 정해 놓은 것도 아니고 하루는 푸른 바닷가, 다음날 일정은 그곳 바다를 뒤로 하고 산속의 숲이나 맑은 개울가로 자리를 옮긴다. 그러니까 바다와 산을 한꺼번에 보고 즐기는 셈. 그러므로 행선지 방향만 대충 정해 놓고, 예를 들면 ‘강원도 산속으로 요번엔 정선 땅 오지를 한번 가봅시다. 그 애오라지 뱃사공과 정선아리랑으로 유명한 --’ 하고 말하는 정도. 일정마저도 처음 출발은 3박 4일이었지만, 4일도 좋고 5일간도 좋고 그때그때의 형편 따라서 날짜가 천연될 수도 있으니까 어느 해엔 1주일 정도 걸린 적도 있었다. 그리하여 첫해는 동해안 바닷가에 들렀다가 정선 산속으로 들어갔었고, 또 어느 해엔가는 남해안을 목적지로 하여 상주해수욕장과 해남의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 고택(古宅)과 대흥사, 신지도 섬의 명사(鳴砂)해수욕장 등등. 우리들의 여름 여정은 그렇게 뭐- 바쁘게 서두를 것도 없고, 쉬엄쉬엄 산보하듯이 그저 산천경개 구경으로 더디고 늘어진 여행이었다. 차편이야 형편 따라서 기차 버스 택시 등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잠자리는 언제나 ‘민박집’이었다. 밥 해먹는 취사 당번도 언제나 고정이었다. 세 사람이 각자 배낭 속에 챙겨 온 밑반찬과 코펠 같은 용기들을 몽땅 꺼내놓고, 쌀을 씻고 밥 앉히고 국 끓이는 일은 한 교수가 도맡고, 여선생님은 옆에서 계란 프라이를 만들거나 가볍게 그냥 달걀 풀어서 스크램블 만들어내는 것이 주특기라면 고작이었다. 그럼 제일 연하인 노경식이는 할 일 없었나? 아암, 있었고말고. 노경식은 가서 물 떠오고, 가게에 들러서 병술과 안주거리 사오는 등 잔심부름이나 하고, 밥 먹고 나서는 밥그릇과 양재기 씻어내는 설거지 하고, 그러고 또 여행경비의 회계를 책임지는 등등이 나의 몫이었다. 그러고는 여름밤이 짙어가면 셋이 둘러앉아서 술잔을 기울이며 설왕설래 우리 연극계의 현황과 뉴스거리와 객담, 문제점들이 화제의 중심에 오른다. 무엇이 어떻고 누구 아무개는 어쩧고, 한국연극의 과제와 내일은 어찌해야 된다는 등등. 그야말로 “한국연극”이 도마 위에 올라서, ‘춤추고 요절이 나고 작살나는’ 판이다. 우리 서로가 술잔 권하고 마시고 먹고, 편안하게 웃음꽃을 피우면서 -- 그같은 한국연극에 대한 화제와 담소는 여름밤이 이슥해질 때까지 그칠 줄을 모른다. 대부분이 열두 시 자정을 훌쩍 넘기기 일쑤이고, 어떤 때는 새벽의 한 시 두 시, 먼데서 새벽닭 울음소리가 들릴 때까지도. 비로소 여선생이 한 말씀을 하신다. “자- 그만 한숨 눈 붙입시다. 벌써 열두 시가 넘었어? 허허. 또 내일 일정이 남았으니까.” 그러니 생각난다. 한번은 해남 대흥사 큰절 밑에 민박집에서의 일. 어느 날 늦은 아침을 짓느라고 마당가에서 부산(?)을 떨고 있는데, 갓난애를 포대기 둘러서 등에 업은 주인집 늙은 할머니가 상추 쑥갓 같은 풋것을 한 줌 뜯어서 들고 다가왔다. 그러면서 고개를 갸웃하고 웃으며 하는 말이, “넘들은 식구끼리 가족으로 바깡쓰를 댕기는디, 뭣 허는 사람들이래요. 재미도 하나 읎이 사내들 남자끼리만 셋이서? --” “하하하! --” 그러자 여선생은 그런 말씀에 수긍이 간다는 듯 하늘을 쳐다보고 소탈하게 웃고 만다.
이와 같은 우리의 추억담을 언젠가 한상철 교수가 멋있게 풀어쓴 적이 있었다. <아름다운 이들과 떠난 그해 여름>(『문화예술』2003년 8월호)이란 제목으로, 생전의 그 한 선생 글을 전문으로 옮겨본다.
‘1980년대 초반 노경식씨와 나는 여석기 선생님을 모시고 여름방학 동안 유명 휴양지나 사찰을 찾아 더위를 피하는 여행을 했었다. 사진에 보이는 구례 화엄사 방문은 그 여름 여행의 하나였다. 약 5, 6일 정도의 기간을 두고, 두 서너 곳을 도는 이 여름 여행에서 그해에는 서울서는 가보기 쉽지 않은 남해의 상주해수욕장과 구례 지리산, 남원의 광한루와 지리산 뱀사골을 거쳐 서울로 돌아오는 여정이었다. 상주해수욕장에 간 것은 일행 중 바다를 특별히 좋아한 사람이 있어서가 아니라 여름 여행의 상징인 바다를 빠뜨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해수욕을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해수에 몸을 담가보고 넓은 바다를 바라보며 텐트 속에서 쉬는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서였다.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목조건물의 하나인 ‘각황전’(覺皇殿)이나 그 뒤편에 있는 쌍4사자석탑’(双四獅子石塔)의 아름다움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지만, 올림픽고속도로가 개통된 지 얼마 안돼 사람들이 몰려들어 계곡과 맑은 물이 일품인 뱀사골을, 악취가 풍기는 다시 가보고 싶지 않은 곳으로 바꾸어 놓은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남원이 고향인 노경식씨 말고는 초행길인 우리에게 ‘광한루’(廣寒樓)는 춘향과 이도령의 로맨스가 꽃피는 그윽한 고장은 아니었으나 그걸 대신해 준 것이 남원 명물 ‘숙회’(熟鱠)였다. 평생 서울서 자란 나에겐 언젠가 대학 시절 신설동「형제추탕」집에서 먹은 추어탕이 전부였는데, 이 숙회는 보기와 맛이 생전 처음이었다. 그후 서울에서 같은 음식을 먹어보았지만 옛날 남원에서 먹은 맛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사람의 기억 중 가장 오래가는 것이 미각이라 했다. 아마도 그 숙회 맛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지나간 과거는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한다. 그런 중에도 여선생님과의 여름 여행은 “그런 시절이 다시 왔으면 --” 하고 반추되는 여름철의 회상이다. 일상사로부터 벗어나고 은사, 선배라는 공적 관계를 떠나 인간적으로 한 가족처럼 친근하게 접할 수 있는 기회란 이같은 여름 여행 이상 가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런 시절이 다시 왔으면 --” 하고 아무리 반추해 봐도 인제는 모든 게 허사가 되고 말았다. 지난 8월 12일 우리의 한상철 교수가 유명을 달리하고 나서, 그 이튿날 아침에 나는 그 부음(訃音)을 여선생님께 전화로 알려드렸다. 어제 오후에 대학로의 서울대학병원에서 애석하게 되었노라고. 그러면서 나는 선생님의 연만하신 미수(米壽, 88세)와 ‘참척’(慘慽)임을 감안하고, 굳이 문상은 말고 생략해도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을 말씀드렸다. 그러자 여선생님의 총알 같은 말씀이 내 가슴을 뭉클하게 하고 콧날이 찡- 하였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들의 인연이 어딘데 --”
이 글을 쓰는 중에, 때마침 ‘문화의 달’ 10월을 맞이하여 정부에서는 한상철 교수의 한국연극에 끼친 공적을 기려 ‘은관문화훈장’을 추서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