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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식의 짧은 글 및 에세이입니다.
박영희- '영미희곡 번역의 불... 인물연극사
 
*인물연극사- 박영희 (1941-1973)*

'영미희곡 번역의 불꽃 같은 삶'

1. ‘애틋한 연극사랑’

10여 년 전인가, 어느 신문사에서 뜬금없이 죽은 번역가 박영희씨에 관해서 짧은 글 하나를 부탁받고, 난 놀래서 그 기자에게 당신이 어떻게 박 아무개란 여자를 아는가고 되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또 이번에 한국연극100주년을 맞아 『인물연극사』를 만들겠다며 내게 원고청탁이 왔다. 나는 적잖게 놀랍고 반갑고 기쁜 마음에 이를 쾌히 응락하고, 시방도 내 채꽂이(書架)의 한쪽 귀퉁이에 먼지 낀 채 모셔놓고(?) 있는 그의 『슬픈 카페의 노래』(박영희번역극집)를 찾아냈다. 그런데 그 허술한 책갈피 속에서 ‘애틋한 연극사랑’이란 제목의 2백자 원고지 세 장짜리 토막글이 발견되는 것 아닌가.
“가만히 헤어보니, 어언 25년의 오랜 세월이 흘러갔다. 때에 연극인 朴英姬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불과 서른두 살의 아까운 나이에 이승을 하직하게 되자, 우리들 연극인 모두는 망연자실,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희 그녀가 그토록 아깝고 슬펐던 일은, 그의 모나지 않은 소탈한 성품과 ‘가난한 연극’에 대한 뜨거운 정열, 그러고 무엇보다 그녀의 영롱한 재능이 한없이 안쓰럽고 절통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지금도 어제 일인 듯 생생하게 그를 추억하고 있다. 별로 예쁠 것도 없는 모습이었지만, 그녀의 뛰어난 번역솜씨와 연극적 언어감각은 다른 이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으며, 여기에 여인네의 자상하고 섬세하고 고운 마음씨와 애틋한 연극사랑을 생각하면, 상기도 가슴 저미는 아픔을 떨쳐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연극인 박영희여, 너는 오늘날에도 하늘나라에서 우리나라 한국연극의 만화방창을 가슴 조이며 축원하고 있으리!”
그러고 보니 우리의 영미희곡 번역가 박영희가 유명을 달리한 지도 36년 전 저편 너머의 일. 흔한 말로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니까 하마 벌써 세 번을 바뀌고 네 번째로 넘어가는 까마득한 옛일이 되고 말았다. 1960년대 중반부터 어린(?) 박영희가 한국연극에 첫발을 들여놓은 이래 그가 활동한 시기는 정확히 7, 8년에 지나지 않으나, 한국 연극계에 끼친 그의 공적과 봉사는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연극평론가 한상철이 그당시 발행된 『슬픈 카페의 노래』의 「작품해설」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故 朴英姬씨가 세상에 남기고 간 번역희곡은 근 20여 편에 달한다. 그들은 거의 전부가 이미 외국에서 우수한 희곡으로서의 평가가 내려진 작품으로 그 소개 자체가 한국의 劇文學의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어 주는 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작품들이다. 씨가 번역한 희곡들은 그 작가나 작품의 스타일이 매우 새롭고 신선할 뿐만 아니라 또한 다양하기 그지없다.”
1960년대의 ‘명동연극’(한국연극)은 그야말로 모든 것이 부족하고 영성한 시절이었다. 50년대 말에 창단된 제작극회를 비롯해서 실험극장과 자유극장 민중극장 등의 동인제 극단들이 기지개를 펴기 시작하였고, 극장다운 극장이라고 해야 국립극단이 차지하고 있는 명동국립극장과 남산의 드라마센타, 그리고 충무로의 카페 떼아트르와 운현궁의 극단 실험소극장 등. 더구나 우리나라 희곡작가의 태부족은 공연 레퍼토리의 선택에 있어 걱정과 고민으로 목말라했으며, 바다 건너 영미국을 비롯한 서양 현대연극의 사조 수용 및 희곡작품의 채택과 정보 또한 쉽지 않았다. 이럴 즈음에, 한상철의 지적대로 젊은 박영희의 번역활동은 서양연극, 특히나 현대 영미희곡의 새로운 사조와 작품과 현역작가를 우리나라에 소개하는 데, 발군의 성과를 발휘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연극인으로 하여금 외국의 현대연극에 눈 뜨게 하고, 한극 희곡문학의 풍성한 토양과 그 발전에 크나큰 공헌을 한 셈이다.

2. 영미희곡 번역의 길

박영희는 1941년 아버지 봉상(鳳翔, 어머니 崔玉順)씨의 둘째딸로 전라북도 군산(群山)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거기서 국민(초등)학교와 군산여중을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서는 정신여고 졸업과 이화여대 입학, 1963년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에 드라마센타 연극아카데미와 고려대 대학원(영문학, 1964)에 각각 진학했다. 그가 모교인 이화여대 아니고 고대 대학원으로 진학한 것은, 순전히 이대 영문과 교수 나영균의 강권(?)에 의해 여석기의 지도를 받고자(졸업은 못함)함이었다. 그리고 그가 사회에 나와서 직장활동을 가진 곳은 콤페션한국지부와 토지개량연합회, 농어촌개발공사 등 세 군데에 불과하다. 그녀의 훌륭한 영어실력 때문에 아마도 그 회사의 업무서류를 영역하고, 또한 외국손님을 접대 통역하는 일이 고작. 그러고 나서 그녀의 일상생활이란 밤이나 낮이나 연극에만 미쳐서(?) 연극판에서 살고, 굿판에서 놀고 돌아다니는 것이 전부였다.
연보에 의하면, 그의 첫 데뷔는 1965년 6월 <햇빛 밝은 아침>(퀸테로兄弟 작/ 허규 연출) 번역으로 극단 실험극장의 ‘토요살롱’ 무대였다. 또한 같은 해 같은 달에는 <피의 결혼>(Blood Wedding, Garcia Lorca 작/ 김정옥 연출)을 번역하여 이화여대 문리대 연극부에서 공연하였다. 그로부터 그의 번역작업은 연년이 잠시도 쉴 새 없이 죽을 때까지 7년 동안을 그야말로 눈부시게 정열적으로 계속되었다. (아마도 일찍 죽을려고 그런 건 아닌지!) 그 무렵 그의 영미연극 번역활동은 한국연극계(서울) 전체를 ‘커버’(망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71년도 한 해 동안에 무대에 올린 번역극만 7편. 상반기의 <꽃피는 체리>를 제외하면, 하반기 가을 시즌에 무려 6편이나 몰려있다. 9월 달 <슬픈 카페의 노래>를 시작으로 10월은 <잉여부부>(剩餘夫婦)와 <헨리 8세와 그의 여인들>, 11월엔 <여름과 연기> <이탈리안 걸> <사랑을 내기에 걸고> 등등.
해서, 술자리에서 내가 한 말 --
“명동 바닥에 연극 간판(포스터)이 모두 박영희 번역이다! 야, 박영희가 한극연극 죄다 말아묵을래?”
“내가, 뭘? 자기네들이 작품 없다고 달래잖아? 호호.”
여기서 한마디 짚고 넘어가야겠다. 노경식의 장막극 <달집>(국립극단 61회 공연/ 임영웅 연출)이 명동국립극장 무대에 올려진 것이 71년 9월의 일. 그러고 보니까 그해 가을에 올려진 우리 창작극으로는 내 작품이 유일한 것 아닌가싶다. 명동의 연극 간판은 온통 박 아무개의 번역작품으로써 도배하다시피 했으니까. <달집>이 국립극장 레퍼토리에 선정된 경위도 이렇다. 박영희의 전화가 어느 날 내가 근무하고 있는 출판사 편집국으로 왔다.
“노경식씨 -- 자기, <달집> 원고 좀 볼 수 없어?”
“왜?”
“으응, 누가 작품을 보자고 해서. 내가 작품이 좋다고 자랑했거든?”
여기 박영희의 ‘자기’란 언사는 행여 오해 없기 바란다. 그때 우리 ‘워크숍 동인들’은 그런 호칭에 서로 익숙해져 살았으니까. <달집>과 국립극단과 임영웅과의 3각인연은 임 선생의 다음 글 로써 이해할 만하다.
“일찍이 아깝게 우리 곁을 떠나 저세상으로 간 박영희라는 희곡 번역가가 있었다. 71년 어느 날 그녀가 나를 찾아와서 내가 연출했으면 좋을 것 같은 창작희곡이 있다고 <달집>을 추천했다. 원고를 보자고 했더니 당시 여석기 선생님이 간행하던 『연극평론』(제4호)에 실릴 예정이어서 지금은 인쇄소에 있다고 말한다. 급한 마음에 교정쇄라도 보자고 했더니, 당장 작가 본인에게 연락을 해서 정말 교정쇄를 가져왔다. -- 나는 그 즉시 <달집>을 국립극장에 추천했다.”
앞에서, 그가 한국연극계 전체를 ‘커버’했다는 말은 빈 것이 아니다. 그때부터 40여 년 가까운 시간이 흘러가며 오늘의 연극계 지도자가 된 모든 연극연출자가 박영희 번역극의 도움과 신세(?)를 진 셈이니까. 따라서 공연순서대로 적어보면,

허 규 : 2편 <햇빛 밝은 아침> <돈키호테>(Man of La Mancha, D. Wasserman 작/ 극단 실험극장 22회 공연, 1967)
김정옥 : 3편 <피의 결혼> <꿈과 기쁨을 담뿍>(You can't take it with you, M. 하트 G. 코프만 共作, 이화여대 문리대 연극부, 1970) <슬픈 카페의 노래>(The Balld of Sad Cafe, A. Albee 각색/ 극단 자유극장 20회 공연, 1971)
임영웅 : 3편 <덤 웨이터>(The Dumb Waiter, H. Pinter 작/ 카페 떼아트르, 1969) <꽃피는 체리>(The Flowerimg Cherry, R. Bolt 작/ 극단 산울림 3회 공연, 1971) <헨리 8세와 그의 여인들>(헬만 그레시어커 작/ 극단 산울림 4회 공연, 1971)
전세권 : 2편 <쥐덫>(The Mousetrap, A. Christie 작/ 극단 신협 77회 공연, 1970) <여름과 연기>(Summer and Smoke, T. Williams 작/ 극단 동양 2회 공연, 1971)
그리고 유덕형 오태석 이완호 유치진 등이 각 1편씩이다.
유덕형 : <생일파티>(Birtday Party, H. Pinter 작/ 극단 드라마센다 28회 공연, 1970. 『세계의 문학대전집』‘현대희곡’ 수록, 동화출판공사)
오태석 : <잉여부부>(Odd Couple, N. Simon 작/ 극단 드라마센타 31회 공연, 1971)
이완호 : <이탈리안 걸>(Italian Girl, I. 머독 J. 소온더즈 공동각색, 제작극회 15회 공연, 1971)
유치진 : <사랑을 내기에 걸고>(Sleuth, A. Shaffer 작/ 극단 드라마센타 32회 공연, 1971) 동랑 유치진(1905-1974) 선생은 그 2년 후에 세상을 버리셨으니 당신의 연출작으로서는 마지막 작품이 된 셈이다.

번역가 박영희보다 앞선 웃대어른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영미연극 도입의 1세대격인 오화섭 여석기 두 교수를 필두로 하여, 이근삼과 나영균 문일영 한상철 신정옥 등 제씨들. 그러나 다만 단순하게 영미의 희곡번역만이 아닌 현대의 영미연극을 우리나라에 소개해 가면서, 몸소 연극현장과 숱한 연극인들 속에 파묻혀서 그들과 함께 울고 웃고 술 마시고 장난치고, 살을 맞대고 호흡을 같이하며 직적접으로 활동했던 번역자는 박영희가 유일하다. 뿐만 아니라 유명작가 로르카와 L. 피란델로 등은 각각 스페인어와 이탈리아어가 원본이다. 그런데도 박영희가 용기있게 영어본에서 번역해낸 것이다. (왜냐면 그 시절에 스페인이나 이태리 분야의 학자 교수들은 별로(?)였으니까) 그러므로 그의 번역작품 가운데 <피의 결혼>이나 <당신 좋으실대로>(Right you if you think you are, 高大劇會, 1967) 같은 것을 평가하면, ‘비록 중역(重譯)이긴 하나 현대의 고전이라 할 이들 작품을 소개한 것은 자못 의의 깊은 일이었다’고 하겠다.

3. 박영희의 아까운 죽음

1973년 3월 28일 아침 --
그의 안타까운 요절(夭折). 하마 수십년 세월이 흘러서 나도 인제는 고희를 넘긴 나이지만 시방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애잔한 마음의 고통과 아련한 애상(哀傷)에 젖지 않을 수 없다. 그날 나는 여느 때처럼 사무실(동화출판공사 편집국, 중구 북창동 소재)에 출근하여, 동료직원들과 함께 시시덕거리며 아침커피를 한잔씩 들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아침 열 시경 뜻밖에도 전화 한 통가 내게 걸려왔다. ‘아침 초장부텀 어인 전화!’ 전화선 너머 낯선 여자의 울먹이고 떨리는 목소리(그의 친구 김미자) --
“노경식씨죠? 박영희가 죽었어요! 교통사고로. 오늘 새벽에.”
“뭐야! 누가 죽어, 박영희가? --”
나는 생판 거짓말 같은 그의 말에, 힘껏 뒷통수라도 한 대 얻어터진 듯 망연자실하고 순식간에 머릿속이 몽롱해질 밖에.
“그런데, 영희는 시방 어디 있습니까?”
“적십자병원에 --”
“적십자병원? 정말 박영희가 죽었단말요?”
“서대문 로타리에 있는, 적십자병원 영안실에 있어요. --”
그 여자의 얘긴즉슨, 내 회사전화 번호를 영희수첩에서 찾아 노경식과 우선 먼저 통화하고, 실험극장 등 가까운 몇 군데에 생각나는 대로 알려줄 참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회사 사장실에 올라가 ‘이른 조퇴’(早退)를 승낙 받고, 정신없이 내 책상 자리에 다시 돌아와 고려대학교의 여석기 선생에게 비보를 간단히 전하고는, 곧장 3층 사무실을 뛰어내려와서 적십자병원으로 달려갔다. 북창동 사무실에서 그곳 병원까지는 내 발로 걸어서 갔는지, 시발택시를 탔는지, 아니면 남대문 정류장에서 시내버스를 이용했는지 그에 관한 기억은 없다.
내가 갔을 때는 병원 영안실엔 아무도 없이 적적하고 한산하기만 했다. 다만 옆자리의 다른 집 장례꾼들만 너댓 명. 나는 눈물도 슬픔도 잊은 채 멍한 기분으로 하릴없이 평상가에 앉았다가섰다가 이리저리 서성거릴 뿐이었다. 그러다가 오후 한두 시경, 여석기 교수님이 박영희 관 앞에 섰다. 아직은 빈소도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그 앞에, 여 선생이 카키색 바바리코트를 입고 돌부처처럼 굳은 자세로 서서, 머리를 푹 숙인 채로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며 하염없이 울고 계시는 것 아닌가! 그제서야 나도 울컥- 북받치는 설움에 뜨거운 눈물을 쏟아내면서, 서럽게 컥컥- 슬픔을 곱씹을 수가 있었다.
‘영희 가시내야, 참말로 니가 죽었구나! --’
그 하루 전날, 3월 27일은 ITI(국제극예술협회)가 정한 ‘세계연극의 날’이었다. 해마다 그날에는 남산 드라마센타 극장에서 관련 연극인들이 모여 조촐한 기념식을 갖는다. 그 자리에선 내노라 하는 전세계의 유명 연극인이 발표한 그해의 ‘연극메시지’를 낭독하고, 형편이 가능하면 기념연극을 하나 공연하는 등. 왜냐 하면 동랑 선생이 수년 전에 ‘한국본부’를 처음으로 탄생시키고 첫 위원장을 맡은 관계로, 자연스럽게 드라센타가 그 사무실이 되고 제반업무가 그곳에서 행하여졌다. 그당시 제2대 위원장은 여석기 교수. 박영희는 영어를 잘한 까닭에 ‘ITI 사무차장’ 명함을 달고 있었다. 그날도 그는 기념행사의 실무진행을 위해 드라마센타에 올라가서 하루 종일 보냈던 모양이다. 그러고 오후에는 명동으로 내려와서 가까운 몇몇 젊은 연극인들과 술자리에 어울렸다. 연극 친구들은 시도 때도 없이, 낮이나 밤이나 술판을 잘 벌리니까. 그러다가 저녁이 되고 밤 열두 시의 ‘통금시각’(야간통행금지)이 가까워졌다. 그때는 통금시간이 다가오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너나 없이 야단법석이다. 버스 정류장마다 막차를 타기 위해서 우왕좌왕 난리들이고, 도로 한가운데까지 뛰쳐나와 택시를 잡기 위해 두 팔 번쩍 들고, ‘서울역’, 신촌‘, ‘청량리’, ’용산‘, ’미아리‘, ’동대문‘ -- 등등 필사적으로 고래고래 목청껏 소리를 질러댄다. 특히 술꾼들은 마시던 대폿잔도 내팽개치고 강아지처럼 털고 일어나서 허둥지둥, 그야말로 ‘귀가(歸家)전쟁’이 한판 벌어지는 것이다.
그녀도 그날은 늦게까지 술자리에 어울리고 술값도 자기 돈으로 냈다. 핸드백 속 지갑을 톡톡 털어서 집에 돌아갈 버스삯만 달랑 남기고. 평소에 그는 밤중에 집에 갈 택시비만큼은 따로 갖는 것이 반드시 버릇처럼 상례였다. 아무래도 약한 여자여서 그런지, 콩나물 시루 같은 만원버스에 시달리고 곤드레만드레 술 먹은 취객들의 염치없는 성 희학질을 피하자는 속셈이다. 그런데 그날은 천금 같은 그 ’시발택시비‘까지 털어서 후배 연극인을 위해 희사한 것. 그러고는 밤 열두 시의 늦은 시각에 막차버스를 올라타고 귀가 길을 서두른 것이다. 그녀 집은 서대문구 갈현동 어디쯤. 갈현동 앞의 4차선 대로는 통금시간이 가까워지면, 멀리 벽제와 구파발로부터 서울에 들어오는 택시와 버스들이 촌각을 다투며 쌩쌩 - 달리는 지역이다.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말 그대로, 눈 깜짝 할 새에 쏜살같이 달려오고 달려간다. 정신없이 아찔 아찔하고, 깜빡 깜빡한 순간들이 전개된다. 이름하여 ’총알택시‘.
박영희는 집 앞 버스정류장에 내려 그 넓디넓은 횡단보도를 건너는 중에, 미처 다 건너가지 못하고 도로 중앙선에 멈춰서서 지나가는 차들이 일단정지하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그런데 이를 어찌 하랴! 구파발 쪽에서 달려오던 ‘총알택시’가 밤중에 그녀를 미처 발견치 못하고 그대로 덮치고 말았다. 오호 통재라! -- ‘총알택시’가 우리의 박영희를 총알같이 치어 저만큼 하늘끝까지 높이높이 치솟아오르게 한 것.
그의 장례 3일 동안에 정말로 수많은 조문객이 찾아들었다. 연극계의 많은 사람과 친지들은 물론이고, 생각지도 않게 그 엄혹하던 시절 박정희의 10월유신 군사 독재정권에 반대하던 반체제 민주인사들까지 찾아와 그의 영구 앞에서 눈물 지었다. 장준하와 백기완 선생을 비롯한 김정남 김도현과 동아일보 신문기자 이부영 장윤환 등등. “그녀를 아는 모든 사람이 그의 죽음을 슬퍼했고, 평소에 모나지 않은 성품과 맡은 일에 대한 열성과 영롱한 재능에 대해 새삼 기억을 되새기는 것이었다. 그녀를 아는 모든 사람은 그가 관심을 표시한 일과 분야에 있어서 앞으로 얼마나 많은 공헌을 끼칠 수 있을까 하는 데 생각이 미쳤을 때, 더욱 이 불려(不慮)의 죽음을 아까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젊은 박영희의 주검은 벽제화장터에서 화장되고, 그 재는 인근 솔밭의 무성한 야산에 뿌려졌다.

4. 『슬픈 카페의 노래』와 ‘영희연극상’

박영희와 나, 그리고 그당시 우리 젊은 작가들의 끈끈한 유대와 깊은 우정은 ‘한국극작워크숍’(여석기 주재)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희곡작가 양성을 위한 워크숍 활동은 10여 년을 넘게 오랫동안 지속되었는데, 7, 80년대를 거쳐오면서 많은 신인작가들을 배출하게 되었다. 워크숍과 관련을 맺고 성장한 새내기 작가들은 직간접적으로 거의 전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그 면면을 살펴보면 박조열과 김(巫)세중(전위예술가) 윤대성 오재호(방송작가) 고동률(작고) 이재현 윤조병 오태석 조성현 이종남(작고) 황인수 박영희(번역) 노경식, 그리고 2기(期) 때(한상철과 박조열 주도) 이강백 오태영 김영무 윤한수 강추자 이병원 이하륜 김병준 이광복(소설가) 엄인희(작고) 이언호(재미) 엄한얼(작고) 유종원(승려) 이기영(작고), 3기의 이현화 김한영(방송PD) 김병종(한국화가) 최인석(소설가) 등등.
이해랑 선생 생전에 어느 자리에선가, 내가 여 선생의 ‘한국극작워크숍' 활동과, 사비(私費)로 출연한 계간지 『연극평론』의 발행 내력 등을 자초지종 이야기해 드렸더니 하는 말씀이,
“그래? 난 여 선생이 영문학자 대학교수로 폼만 잡는 줄 알았드니, 훌륭한 일을 해냈구나. 무엇보다 사람 길러내고 키우는 일이 제일 크고 좋은 일이거든. 그러고 보니까 내가 기른 제자는 민호(장민호, 국립극단) 하나밖에 없어. 허허허.”
박영희의 연극활동 무대는 주로 두 군데. 하나는 그가 극단 단원으로 몸담고 있는 ‘실험극장’, 그러고 또 하나는 명동의 ‘카페 떼아트르‘. 운현궁 쪽의 ’실험소극장‘은 심심찮게 그냥 연극계 얘기와 정보 소식을 듣고, 배고픈(?) 후배 연극인들한테 술 사주고 밥 사주는 정도. 그는 선배들에게는 술을 잘 사지 않는 버릇이다. ’카페‘는 커피 등 음료를 파는 겸용 소극장(야간)이었으므로, 특별한 일 없는 한 오후에는 틀림없이 꼭 출근해 있다시피 하였다. 그를 만날 일이 있거나 약속을 위해서라면 그곳에 들르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 박영희와 무슨 연락할 일이라도 생기면 카페와 실험극장 두 곳에 전화를 걸거나 찾아가면 쉽게 가능하다. 요즘처럼 무슨 핸드폰이 있는 것도 아니고 통신시설이 부족하고 불량한 시절이었으니, 흔히들 남의 사무실이나 다방을 이용하는 것이 비일비재 --
그러니까 그를 저세상에 보내고 나서 우리는 한동안 그에 대한 허전함과 그리움을 달랠 길이 없었다. 명동에라도 나갈라치면, 명동국립극장이나 카페 떼아트르, ‘명성’ 술집 혹은 등 뒤에서 금새 내 이름을 부르고 달려오거나, 또 어느 우리가 잘 가던 대폿집 같은 데서 미리 앉아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이심전심으로 박영희를 기념하는 무슨 일인가를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다시 말하면, 그의 아까운 죽음에 대한 ‘슬픔이 어느만큼 가시고 난 다음 그녀의 죽음을 누구보다도 애통했던 친족을 위시해서 평소에 그를 잘 알던 일부의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그녀의 기억을 길이 간직할 수 있는 무언가 조그만 일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박영희의 큰언니(청량리 ‘경찰병원’의 안과과장)가 여 교수님을 찾아와서 봉투 하나를 내놓았다. 가해자 택시회사로부터 그 보상금을 얼마큼 수령했다는 것. 그러나 자기네는 이것이 필요없고, 다만 죽은 영희를 생각하고 연극계를 위해서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는 간절한 내용이었다.
우리들은 그것은 그것이고, 처음의 생각대로 연극인 각자의 십시일반 모금액으로써 ‘박영희번역극집’의 출판비용을 충당하기로 다짐하였다. 그렇다고 무슨 야단스럽게 취지문 같은 문건을 작성하지도 않았고, 그냥 아는 사람들에게 내가 혼자서 전화질을 하거나, 한 입 건너 두 입 건너 서로서로 이야기기를 주고받는 방식으로 추진되었던 것이다. 그때의 우스갯소리 일화 하나.
가령 드라마센타 출신의 신 아무개, 민 아무개 배우가 그때는 ‘조금 떠서‘ 남산 KBS의 TV드라마에 얼굴을 비치고 있었다. 그들에게 통화를 하려고 해도 잘 연락이 되질 않았다. 그래서 내가 찾아 만나서 하는 말이,
“여보시오, 신형? 통닭값 내놓으시오. 통닭값 --”
“통닭값이라니, 뜬금없이! --”
그가 놀래서 눈을 크게 뜨고 히죽이 웃는다.
죽은 영희는 남의 연극 구경을 갈 때 빈손으로 가는 법이 절대로 없다. 출연배우들을 위해 반드시 먹을 것이나 마실 것을 사갖고 간다. 그 시절엔 너나 없이 가나하고 배고픈 시절이었으니, 그냥 인사치례라기보다는 시장끼를 우선 채워주는 것이 그 실속이고 목적이다. 그러니 그의 핸드백에 돈이 딸리면 아예 극장 가는 것을 포기하기로 한다. ‘아이, 수중에 한푼 없는데, 미안하게 어떻게 구경가? --’
명동에 ‘영양센타’라는 구수한 통닭가게가 하나 있었다. 그땐 통닭구이라면 시쳇말로 ‘쨩!-’이었다. 드라마센타에서 연극공연이 있는 날은 그는 곧잘 ‘통닭’ 한 마리를 사들고 극장에 올라가서, 배우들의 분장실에 넣어 주었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어느 때 돈이 없으면 내 사무실에 전화한다.
“노경식씨, 자기 드라마센타에 구경 안가?”
“가야지. 언제?”
“그럼, 오늘 같이 봐요. 나 ‘까페’에서 기달릴게.”
그리하여 명동에서 둘이 만나면 영양센타에 데리고 가서 닭값을 내가 부담하도록 한다. 그러고 극장에 올라가서는 자기는 그걸 들고 살짝 분장실에 들어가고, 나는 그냥 객석으로 가서 앉아 기다린다. 평소에 난 분장실 찾아가는 것이 별로이다. 아마 모르면 몰라도 그는 노경식 얘기는 꺼내지도 않고, 마치 자기 돈으로 사온 것처럼 버젓이 얌체(?) 노릇을 했을 것이다. 그러면, 어때? 누가 사왔든지. 고생하고 애쓰는 연극쟁이들이 맛있게 먹었으면 됐지, 머.
그러니까 신형에게 한 내 말뜻은, 죽은 박영희 책을 내기 위해서는 그때의 그 ‘통닭값’을 되갚으라는 뜻이렷다! 허허.
어쨌거나 책의 출판비용은 충분히 마련되었다. 지금의 내 기억은 십시일반으로 3천 원씩이 균일가였다. 그런데 5천 원짜리는 중상이고, 일금 1, 2만 원의 출연금은 상당히 고액 수준이었다는 생각이다. 그리하여 1년여의 준비 끝에, 마침내 “박영희 책“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국판 402쪽의 아담하고 멋진 모습으로, 박영희가 불의의 윤화로 세상 떠난 지 꼭 1년 뒤, 1974년 3월 27일 ‘세계연극의 날’에! --
『슬픈 카페의 노래』는 그의 많은 번역물 중에서 7편만 추려서 상재하였다. 그 ‘차례’ 냉용을 보면,

머리말/ 여석기
아더 밀러/ 代 價
테네시 윌리엄즈/ 여름과 煙氣
로버트 볼트/ 꽃피는 체리
에드워드 올비/ 슬픈 카페의 노래
해롤드 핀터/ 덤 웨이터
하워드 새클러/ 아홉時의 郵便配達
폴 진델/ 감마선 線은 달무늬 얼룩진 金盞花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작품해설/ 한상철
잊을 수 없는 女人/ 박조열
우리 친구 英姬야/ 김미자
연 보
題字 여석기/ 裝幀 이중한/ 揷畵 김영태/ 교정 이병원/ 제작 노경식

수록작품 중 <대가>(The Price)는 전년도(1972)의 『연극평론』7호에 전재(全載)되었던 작품이며, <아홉 시의 우편배달>(The Nine O'clock Mail)은 그가 죽은 그해 4월 달에 제1회 ‘전국단막극경연대회’(미국문화원 서울신문사 공동주최)의 지정작품으로 채택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유고(遺稿)가 된 그의 <감마선 -->(The Effect of Gamma Rays on Man-in-the-Moon Marigolds) 역시 같은 해 10월, 극단 실험극장의 제2회 소극장 공연(김영렬 연출)으로 무대에 올려졌다. 또 하나 그는 71년도의 ’한국연극영화예술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현대 영미연극에 관한 박영희의 ‘번역공로‘를 인정하고 높이 평가한 것.

앞서 영희 유족이 여 선생에게 전달한 ‘보상금’의 용처에 관해서는 좀더 연구가 필요했다. 어떤 이들은 가을 시즌에 ‘박영희 기념공연’을 명동국립극장에서 거창하게 갖는 것이 어떠냐는 등 말이 나왔으나, 그것은 다만 한 차례 공연에 그칠 뿐이라는 판단으로 제외되었다. 지금도 나는, 때에 여 선생의 판단과 결정이 백번 옳았다는 생각이다. 여 선생께서는 무슨 연극상(演劇賞) 같은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 그당시 우리나라 연극상으로는 ‘유치진연극상’(드라마센타)과 ‘동아연극상’(동아일보), ‘한국연극영화예술상’(한국일보) 등 큼지막한 큰상들뿐이었으니, 젊은 연극인들을 위해 ‘소박하고 알뜰하고 조그마한 연극상’ 하나쯤을 --
그러나 당사자가 너무 젊은 나이에 죽었으니까, ‘박영희’의 성씨도 빼버리고 겸손하게 이름자만 앞에 붙여서 ‘영희연극상’으로 정하되, 수상자는 영희보다 위쪽으로 소급해 올라가서는 아니되고, 필히 그의 후배 아래쪽 연극인한테만 시상키로 하겠다는 것. 그런데 상의 시상 주관처는, 어디?
“선생님, ‘연극평론사’가 주최하면 어때요?”
나의 이런 말에 여 선생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때는 당신의 『연극평론』잡지가 발행되고 있을 때였으니까 내가 꺼낸 말이었다. 여 교수의 반응 --
“연극잡지는 오래 안갑니다! 한 10년 동안만 할 작정이니까 --”
그래서 ‘영희연극상’의 주관처는 당신이 위원장으로 있는 ITI한국본부가 떠맡게 되고, 또 한 해를 넘겨서 1975년도부터 첫 수상자를 내놓게 된 것이다
제1회 수상자 ‘극작가 이강백’
시상식은 그해 3월 27일 드라마센타에서 열린 ‘세계연극의 날’ 기념식에서 주요식순 중의 하나로 끼어들었다.
연년이, 그리하여 ‘세계연극의 날’에는 반드시 ‘영희연극상’이 시상되었는데, 박정자, 심재찬 등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연극인들이 줄줄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그래서 해마다 그날이 오면, 연극인들로 하여금 은근히 바라고 기대하는 권위있는 젊은 연극상으로 발전해 나아갔다. 현재는 쇠미해져서 그렇지도 않지만.

지금은 박영희가 죽은 지 오래되고, 까마득한 저편에 그녀가 가물가물 서 있다. 이 같은 고희의 나이에 마침 기회가 닿아서 그를 새삼스레 회억하게 되니 감개무량하다. 한국연극을 위한 불꽃 같은 그의 삶을 기리며, 길이 명복을 빌어마지 않는다. (끝)

* '인물연극사- 한국현대연극 100년' 수록
* 『극작에서 공연까지』2009. 봄호(통권 19)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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