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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식의 짧은 글 및 에세이입니다.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축하의 글
 
[‘명동예술극장의 집들이’에 부쳐]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연극예술과 극문학에 몸 담은 지 어언 40여 년 세월! 그동안 나의 어줍짢음과 게으름 탓에 작품집 한 권 변변히 내놓지 못한 주제에, 늦게나마 한꺼번에 5권으로 묶어서 상재하게 되었으니 그 감회가 남다르고 대견스럽고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흥분된다고 하겠다. 지난 2003년에 있었던 “노경식연극제”(舞天劇藝術學會 주최, 대구)의 프로그램 책자에서 한 말로써 그 소회의 일단을 피력할까 한다. ‘지금까지 내가 써온 극작품을 헤아려보니, 무대공연에 올려진 희곡만 장· 단막극 모두를 합쳐서 꼭 32편에 이른다.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숫자이다. 이들 가운데서 그래도 “쓸 만한 작품”이 몇이나 되고, 뒷날까지 건질 수 있는 것은 참으로 얼마나 될까? 때로는 사계의 여러분과 관객들에게서 과분한 평가를 받은 물건(?)이 너댓 편은 되는 것도 같은데, 과연 그런 평가들이 먼 훗날까지 이어질 수가 있으며, 또한 우리나라의 연극예술과 극문학 발전에 작은 보탬이라도 될 수 있는 것일까! 나름대로는 열심히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위안도 되나, 오히려 민망함과 부끄러움이 앞선다. 허나 어찌 하랴. 워낙에 생긴 그릇이 작고 생각이 얕으며 大鵬의 뜻이 미치지 못하는 바에야,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걸어가는 수밖에----‘

서울 생활이 올해로 꼬박 51년이다. 전라도 “남원 촌놈”이 50년대 말, 아직은 6.25전쟁의 상흔과 혼란이 채 가시지 않은 암담한 시절에 청운의 뜻을 품고 서울 도회지에 올라와서 대학에 들어가고, 그것도 문학예술과는 아예 거리가 먼 경제학과에 입학했다가 어찌어찌 졸업이라고 하고는 그냥 낙향해서 3년간의 하릴없는 룸펜생활, 그러다가 또 시골 구석에서 우연찮게 신문광고 하나를 보고는 다시금 뛰쳐올라와 가지고 무작정 남산의 드라마센타 연극아카데미 극작반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 오늘날 노경식의 ‘My Way’이자 촌놈 한평생의 팔자소관(?)이 된 것. 누군가 나에게 경제학을 전공하고 어쩌다가 작가가 되었소 하고 물을라치면, ‘글쎄요, 그냥 “나일론 뽕“이죠, 머.’ 하고 멋적게 웃곤 한다. 연극평론가 한상철 교수가 <노경식 論>에서 적절히 말씀했듯이, ‘노경식이 극작가가 된 동기는 별로 이렇다할 만한 것이 없다.’ 나의 성장기인 어린 시절 고향집은 읍내의 한가운데쯤에 있었다. 즉 남원읍의 가장 번화한 곳으로 잡화상 가게와 음식점들, 중국집, 그러고 하나밖에 없는 문화시설 ”南原劇場“도 그곳에 있었고, 몇 걸음만 더 걸어가면 읍내의 시끌벅쩍한 장바닥(시장통)과 <춘향전>으로 유명한 그 ”廣寒樓“ 옛건물도 바로 지척에 있었다. 일 년에 한두 차례 포장막으로 울긋불긋 둘러치고 밤바람에 펄럭이는 가설무대로 온고을 사람들을 달뜨게 하는 곡마단(써어커스) 구경을 빼고 나면, 남원극장에서 틀어주는 ‘활동사진’(영화)과 ‘딴따라’ 악극단 공연만이 유일한 볼거리요 신나는 오락물이다. 그러고 매년 四月초파일의 부처님 오신 날에 개최되는 ‘남원춘향제‘ 때면 天才歌人 임방울과 김소희 선생 등을 비롯해서 전국에서 몰려드는 내노라 하는 판소리 명창과 난장판의 오만가지 행색 및 잡것들. 신파 악극단의 트럼펫 나팔소리가 <비 내리는 고모령>이나, 또는 ‘울려고 내가 왔던가 웃으려고 왔던가/ 비린내 나는 부둣가에 이슬 맺은 백일홍--’ 하고 애절하게 울려퍼지면 어른 아이, 여자와 젊은이 늙은이 할 것 없이 달뜨지 않은 이가 뉘 있었으랴! 해서 나는 연극이니 영화니 판소리 춘향전이니 하는 ‘딴따라’를 접할 기회가 다른 동무들에 비해 많았다고 하겠다. 그런 것들이 아마도 철부지 어린 노경식과 위대한 극예술(?)과의 첫만남이었으며, 또한 알게 모르게 내 피와 영혼 속에 하나의 어떤 接神의 경지가 마련된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억지로 자문자답해 본다. 그래서 그런지 국민(초등)학교 5, 6학년 무렵에는 학예회 같은 때에 여학생들이 하는 율동(춤)과 동요 등 노래패보다는 우린 당당하게(?) ”연극“ 한 편을 직접 쓰고 만들어서 그 시절(전쟁 때)의 부상당한 상이군경을 위하여 위문공연도 하고, 나는 그럴 때마다 언제든지 여자 역할(어머니 역)을 맡기도 했었으니까. --

그렇게 언저리에서나 맴돌고 무심 덤덤한 나이기에, 오늘의 노경식이가 있기까지 크나큰 優渥과 기회를 베풀어 주신 어른들의 함자를 황송스런 마음으로 여기에 명기하지 않을 수 없다. 경희대학교 경제과 학창 때의 국문과 교수이신 소설가 황순원 선생님, 남산 드라마센타 시절의 동랑 유치진과 연출가 이원경 선생님, 한국극작워크숍의 여석기 선생님 및 박조열 윤대성 윤조병 이재현 등 동료작가이자 박영희 무세중 등 동인들, 그리고 연극세계에 정작 발 들여놓고 나서는 이해랑 차범석 두 분 선생님과 강유정 박용기 임영웅 한상철 김동훈 권오일 등의 존경하고 사랑스런 여러 얼굴들---- (이하 생략)

『노경식희곡집』‘작가의 말’ 중에서

2009년 5월 11일

(* 이 글은 극장측 요청에 의해서 '달집 사연'으로 대체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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