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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식의 짧은 글 및 에세이입니다.
[타향에서] 6- 연극인 박동화선... 전북일보 칼럼
 
[타향에서] 연극인 박동화선생을 기리는 계절

노경식(극작가, 서울평양연극제 추진위원장)

(0) 입력 : 07.05.30 19:45

오늘을 지나 내일이면 초하의 6월이다. 6월 달에는 전북의 연극인들 치고 꼭 기억하고 반드시 기려야 할 어르신이 한 분 계신다. 그것은 왠고하니 지난 날 전북연극의 거인 박동화 선생께서 향년 67세를 일기로 세상 떠난 기일(6월 22일)이 들어있는 달이기 때문이다. 비단 연극인뿐이랴. 전북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화예술인은 물론 각계각층의 지명인사들도 그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것이 우리네 전북인의 도리라는 생각이다.

연극인 박동화(1911-1978) 선생께서 세상을 떠난 지도 어언 29개 성상이다. 흔히 말하기를 선생은 ‘전북연극의 개척자’ 혹은 ’전북연극의 산파‘ 등으로 생전에도 불리셨으나, 내 나름으로는 “전북연극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것이 보다 적확하고 정감이 가지 않을까? 선생이야말로 불모(?)의 전북 전주 땅에 처음으로 현대 연극예술의 씨앗을 뿌리고 가꾸고, 열매 맺게 길러낸 연극거인이다. 선생님은 당신 혼자서 희곡작가이자 연극연출가, 연극제작자로서 일인 다역의 진솔하고도 학같이 고고하며 열정적이고 폭 넓은 연극운동가이다. 고달프고 간고한 지난 60년대 초엽에서부터 ’창작극회‘란 이름으로 몇몇 젊은이들과 뜻을 같이하고, 독창적으로 외롭게 시작된 선생의 순수 연극운동이, 오늘날에 와서는 전주시립극단을 비롯하여 황토 명태 등등 극단 숫자만 해도 12개 단체에 이르고, 연극인 숫자 수백 명에다가 해마다 공연작품이 수십 편에, 그 동안 전국연극제에서의 수차례 수상 경력 등등 그야말로 전국의 명문 지역연극예술로서 ’만화방창‘ 화려하게 꽃피우고 있는 셈이다.

박 선생의 그 인자하고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을 보고싶으면 전주 체련공원에 찾아가면 된다. 연전에 전북 연극인들이 뜻을 모아 선생님의 동상을 건립하고, 좌대에는 그의 대표작 <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았다>의 작품명이 새겨져 있음이다. 그러고 지난 2006년 가을께는 후배 연극인들이 선생님의 일대기를 다룬 연극 <가인 박동화>( 최기우 작/ 류경호 연출>를 무대에 올렸고, 금년에는 또한 선생의 말년(60~70년대)을 소재로 한 새연극을 준비하고 있노라 듣고 있다. 조금은 때 늦은 감도 없지 않으나 얼마나 대견스럽고 의미있는 일인가. 아마 선생께서도 저세상에서, “그놈들 철들었구나. 싹수가 인제사 보여!” 하고 흐뭇하게 미소짓고 계시지나 않을까!

때마침 지금 난, 제25회 전국연극제의 행사 일(심사위원장) 일로 경상도 거제에 내려와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내가 박 선생님을 가까이서 뵈온 것은 겨우 한두 차례 정도. 70년대 무렵에 서울의 명동국립극장에서 첫인사를 드릴 기회가 있었다. 그러자 선생께선 조금은 작은 키와 하얗게 센 머리에, 두 손을 따뜻이 감싸쥐고 가만가만 다정하게 하시는 말씀--

“노 선생, <달집> 공연을 내가 여그서 봤어요. 우리들이야 머, 씨 뿌린 역할밖에 더됩니까? 우리 전북, 고향 땅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많이 써요. 허허~”

세상이 다 아는 박동화 선생의 연극 수제자이자 전북언론의 대기자 문치상씨(풍남제 제전위원장)가 쓴 <선생님! 박동화 선생님!>의 회고 글 중에서 한 구절을 인용함으로써 이 글을 마치기로 한다.

‘선생님! --이토록 믿음직한 후배들이 훌륭하게 성장하고 있음을 기뻐해 주시고, 그들의 앞날이 더욱 힘차고 풍성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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