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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식의 짧은 글 및 에세이입니다.
선생님 선생님, 김동원 선생... 弔 辭
 
<弔 辭>

선생님 선생님, 김동원 선생님!
선생님, 성희가 왔습니다. 저 백성희를 비롯하여 수많은 대한민국 예술인들이 지금 이렇게 우리 선생님 앞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김동원 선생님은 한 마디 말씀도 없으시군요. 선생님의 ‘영원한 햄릿’ 마지막 대사, “남은 것은 모두 침묵이다”라는 말을 인제야말로 손수 실천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선생님, 진실로 억장이 무너지고 중치가 막혀서 할말을 잃어버렸습니다.

한평생 사랑하는 사모님과 장성한 세 아들, 그리고 귀여운 손자손녀들을 뒤에 두고 어찌 홀홀히 이승을 하직하셨다는 말입니까! 선생님께서 병석에 누워 계실 적에도 제가 찾아뵈면, 그때마다 선생님께선 가만히 누워만 계실 뿐 한마디도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그래도 선생님이 이촌동 댁에 살아 계실 때는 우리 연극인들은 마음 든든하였고 위로가 되고 힘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인제 선생님이 안계시는 텅 빈 댁에는 사모님 혼자뿐이시겠지요. 정말 애달프고 서럽습니다, 우리 선생님!

우리나라가 일제의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되고 대한민국이 건국될 때의 일입니다. 새나라 최초로 이 땅에 국립극장이 창설되고, 동랑 유치진 선생님의 <원술랑>이 첫무대에 올랐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주인공 원술랑이고 성희는 원술랑의 약혼녀 공주 역이었습니다. 그러고 제2회 공연 <뇌우>에서는 선생님이 주인 영감 주복원, 이해랑 선생님은 큰아들, 백성희는 선생님의 둘째마누라 후취댁 ‘번의’ 역할이었습니다. 선생님, 생각납니다! 그보다 앞서 1948년 봄에 맥스웰 앤더슨 작 <높은 암산>에서 처음으로 백성희가 선생님의 애인 주디 역을 맡게 되었습니다. 아아~ 정말 가슴 벅차고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 햇병아리 배우 백성희가 대선배이신 존경하는 선생님의 상대방 역할이라니!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때의 흥분과 감격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지나간 세월 동안에 알량한 이 백성희가 연극예술에서 김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음은 전생의 인연이요 한평생 축복이며, 연극인으로서의 크나큰 영광이었습니다.

선생님이 무대에 서 계셨음으로써 성희는 연극배우가 되었고, 선생님이 계심으로써 성희는 가시밭 길인 연극인의 길에 의지처가 있었으며, 선생님이 따뜻이 안아줌으로써 백성희의 연기는 마침내 빛날 수가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선 상대역인 저의 분장은 물론 무대의상 코디까지도 일일이 자상하게 해주셨습니다. 김 선생님이야말로 백성희의 스승님이자 저의 연극인생의 길라잡이시며 연극계의 큰 오라버니였습니다. 선생님과 성희는 연극무대에서 반 백년이 넘는 긴긴 세월을 함께 울고 웃으며 지냈습니다. 때로는 선생님의 애인도 되고 아내가 되고 여동생 노릇도 하면서 선생님의 은퇴공연까지 우리는 더불어 살아왔습니다.

선생님, 김동원 선생님!
선생님은 참연극인이십니다. 선생님은 온 세상이 다 알고 있는 진솔한 멋쟁이입니다. 선생님은 영원한 연극배우입니다. 선생님은 예술인과 연극인 모두의 사표이십니다. 선생님은 우리 인생살이의 귀감이십니다. ‘영원한 햄릿’ ‘한국의 햄릿’ ‘영국신사로 살다간 연극배우’ 등등 지금 선생님의 타계하심을 언론마다 다투어 보도하면서 진정으로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관 뚜껑을 닫아봐야 그 가치를 안다더니 정녕 빈말이 아님을 일깨워 줍니다!

김 동원 선생님과 이해랑 선생님과의 금란지교는 온 세상 다 아는 일. 앞서서 이해랑 선생님이 훌쩍 떠나시고 짝 잃은 외기러기처럼 허전해 하시던 선생님께서도 인제는 하늘나라로 옮겨 가시게 되었군요. 앞서 떠나가신 이해랑 선생께서, “동혁이, 이봐? 많이많이 보고 싶었어! 어서 올라와. 내가 동혁이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하고 선생님의 본명을 부르며 반기시겠죠? 두 분 선생님이 하늘나라에서 두 손 맞잡고 다정하게 눈웃음 짓는 모습이 백성희 눈앞에 선하게 보이는 듯합니다.

김동원 선생님, 이승의 온갖 시름 거두시고 평안히 영면하소서!

2006년 5월 17일

백성희,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노경식 대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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