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동지 又聚 유용환의 저술 [무대 뒤에 남은 이야기들]-- 한국연극 50년 秘史-- 을 위해서 쓴 跋文이다.
멋쟁이 연극인 유용환이여
노 경 식 (극작가)
죽으나 사나 우리 시대의 ‘멋쟁이 연극인’ 又聚 劉容煥!
연극인 유용환씨는 한평생 연극동지이자 나의 존경하는 畏友이다. 유용환은 여러 면에서 멋쟁이 연극인이다. 유용환은 좌중에선 비교적 말수가 적어서 아끼는 편이고, 남의 험담들을 별로 입에 올리지 않고 신중하다. 그리고 유용환은 흔히 말하는 어느 배우 뺨 칠 정도의 준수한 외모에다가-- 처음 출발의 학생극 시절엔 ‘무조건’ 주인공 감이었다고 한다-- 한결같이 연극예술에 대한 깊은 사랑과 열정이 남 다르다. 유용환은 무엇보다도 순수예술에 대한 그의 올곧은 연극정신과 심성 및 자긍심은 남들이 따를 수 없을 정도로 빼어난 바가 있다. 비근한 예로 어느 누군가가 연극예술을 별볼 일 없는 ‘광대짓’으로 폄하하거나 하대할라치면, 비록 그자가 고등학교 대학 시절의 친구였었다 할지라도 유용환은 다시는 그와 만나거나 더불어 술자리를 함께하지 않는 고집 불통의 외곬수이기도 하다. 이 책 속에 있는 글, “출연료 받기를 수치로 알았던 시대”를 일독하면 그 속내를 대충은 짐작해 볼 수 있으리라. 그런 의미에서도 연극인 유용환은 우리나라 연극계의 값진 존재이고, 귀중한 보배임에 틀림없다.
유용환씨와 내가 우리 연극계에서 인연을 맺은 것은 30여 년의 세월을 거슬러올라간다. 그와 나의 만남은 대개 70년대 중반부터. 때에 유용환은 촉망 받고 우리 모두의 부러움의 대상인 극단 실험극장의 창단멤버로서 명동 국립극장 네거리가 좁을쎄라 어깨 잡고 휘젓고 다니는 잘난(?) 연극쟁이였으며, 나는 남산의 드라마센타에다 줄을 잇고 그냥 햇병아리 희곡작가로서 겨우 명함만을 들이미는 정도의 ‘촌놈’ 출신에 지나지 않았다. 더구나 성격상 나는 처음의 교우관계에 있어선 약간 꿈지럭거리고 내성적인 편이었으니, 그 기고 만장(?)하고 열정적이며 젊은 멋쟁이 예술가들 앞에서는 자연스레 주눅이 들 수밖에---- 그나저나 우리들의 만남은 동년배의 김동훈 윤대성 등과 함께 강남의 ‘캠프 시절’ 및 ‘대학로 시대’로 이어지고, 그것은 곧 1주일이, 아니 1년 365일 중에 단 사흘이 멀다 하고 서로 만나서 흥건한 연극 얘기와 즐거운 술자리를 갖지 못하면 ‘쌩머리’가 다 아프고 좀이 쑤실 정도의 돈독한 인간관계로 발전해서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유용환씨의 아호 '又聚'(우취)에 얽힌 내력---- 언젠가 술자리에서 누군가 하는 말이, 인제는 우리가 환갑도 지냈으니 서로 아무개 하고 이름 부르기도 뭣 하니까 각자 ‘호‘를 하나씩 지어서 부르기로 하면 어떻소? 그러자 유용환이 하는 말. 나는 호가 있는데. 조선일보 기자 정중헌씨가, 선배님은 맨날 주위에 연극쟁이 술 친구들이 많으니까 '또 술 취했다'는 뜻으로 호를 '又醉'로 하시구료? 그러자 내가 오버랩으로 권하는 말 ---- “여보시오, 우취? 거- ‘취할 취’자 '취(醉)'가 말이 되오? 나중에 자식 손자새끼가 우리 할아버지는 허구헌 날 술독에 빠져서만 살았나! 그렇게 되면 남새스럽지. 거- 발음 '우취‘는 괜찮으니까 한문 글자만 하나 고칩시다. 유용환 당신네 주위엔 연극인 친구들이 항상 많이들 모이니까, ’술 취한 것‘ 대신으로 ’모일 취자‘로 바꿔요. 한자로 '모일 취'(聚)! ----” “그래, 좋소. 그럼 지금부터서 내 호는 ‘모일 취’자 '又聚'요! “
유용환씨가 기록한 이 <무대 뒤에 남은 이야기들>은 지난 50여 년 동안 살아온 그의 연극인생에서 매우 솔직담백하고 확실한 살아있는 역사이며, 따뜻하고 재치 있고 심성 고운 필치로써 엮어낸 동시대 우리 연극들인의 숨어 있는 진솔한 野史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현대연극의 <演劇遺事>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
“우취 양반, 여보시오? 이래저래 좋은 책이 세상에 나왔으니 우리들 앞에 한잔 술이 없어서 되겠소? 꽃나무 가지 꺾어가며, ‘一杯一杯 復一杯, 醉(취)’하도록 또 한차례 마셔나 봅시다. ㅋ ㅋ ㅋ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