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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식의 짧은 글 및 에세이입니다.
죽헌 최문휘 선생의 喜壽를 ... 에세이
 
대전연극인 최문휘 선생과의 긴 연극인연

노 경 식 (극작가)

대전 충남연극의 ‘아버지’ 죽헌(竹軒 최문휘) 선생과의 연극인연은 대개 1985년께로 거슬러올라간다. 그러니까 띄엄띄엄 오다가다 이따금씩 만나도 어느새 20여 년 세월. 최 선생은 언제 만나도- 대개는 대전지역을 내가 방문했을 때 일이지만- 한결같이 친절하고 소탈하고 스스럼없이 반갑게 맞아주신다. 그러니까 난 대전쪽으로 갈 일이 생기면, 젊은 그곳의 연극인들에게 틀림없이 안부연락을 취하도록 다그치고, 또한 무조건 명령(?)하듯이 그렇게 한다. 그러면 전화통 너머에서 벌써 걸걸한 웃음소리와 함께,
“아, 서울 작가 노 선생? 하하. 그럼믄요. 대전까지 오셨다가 최문휘 안만나고 가면 역적이고, 연극인 아니어! 지금 어디 계시유? ”
최 선생은 만사 제쳐두고 우리가 있는 곳으로 쫓아나온다. 그러고는 득달같이 오셔서 다짜곳짜,
“우리 술 한잔 해야지. 쩌리- 갑시다. 대전 음식 잘하는 데는 내가 알어. 어떼요? ‘멍멍 집’으로 가실까? ‘멍멍’ 살코기에다가 소주 한잔 걸치면 그만이어. 허허허-- “
그리하여 음식점에 자리를 잡으면, 당신의 그 쇠소리 같고 컬컬한 목소리로 장광설(?)이 늘어진다. 당신이 요즘 벌이고 있는 충남향토문화 연구소의 자료연구 및 집필하는 일에서부터, 요즘 대전연극의 젊은 놈들은 정신상태가 글러먹었다는 둥둥 불평 아닌 불평까지 마구잡이로 이어진다. 그러면 내가 불쑥 하는 말,
“최 선생님, 인제는 그만 좀 둬요. 뒤에 조용히 앉아서 젊은 연극인들 가만히 지켜보기나 하세요. 그래도 나 보기엔, 최 선생님은 복이 많아요. 훌륭한 연극인 제자와 후배들을 둬서 얼마나 행복한지 알기나 해요? 괘한 투정이랑깨로. 허허.”
“그렇지가 않다니깨, 노 선생? 허허, 허기는 그리어. 사실을 말하자면 대전 젊은 것들이 싹수는 있어요. 늙은이들도 알아보고-- ”

죽헌 최 선생은 세상이 다 아는 대전 충남연극의 개척자이자 터줏대감이다. 일찍이 60년대 초에 벌써 향토 연극예술의 씨앗을 뿌리셨고, 그것을 고이 가꾸고 길러오기 40여 년이다. 뿐인가? 최 선생은 다재다능하여 희곡과 방송극의 집필 연출에서부터 영화평론과 시 쓰기 등등 아니민친 데가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최 선생의 빛나는 업적은 “극단 에리자베스 극장”의 창설과 “충청남도향토문화연구소”의 설립이 아닌가 한다. 그 일에 관해서는 다른 여러분이 많이들 얘기할 할 것이므로 난 생략키로 하고 ----
지난 20여 년 동안에 대전연극과 나의 끈끈한 인연은 세 번쯤 된다. 물론 모든 일이 최 선생님을 통해서지만. 그 첫 번째가 1987년의 일이다. 때에 최 선생은 나의 창작극 <井邑詞>를 가지고 ‘제5회 전국연극제’(전북 전주에서 개최)에 참가할 의향이라는 연락이 왔다. 나야 물론 OK! 그리하여 극단 에리자베스 77회 공연작품(최문휘 기획/ 노경식 작/ 임영주 연출)으로 대전 시민회관대강당에서 초연을 마치고, 이어 전주 무대로 보무도 당당하게 출정(?)하게 된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대전충남 팀이 최우수 ‘대통령상’을 거머쥘 수 있겠다는 당찬 포부를 갖고서. 그러나 그해의 연극제 경연결과는 아깝게도 ‘장려상’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자 최 선생이 우락부락 흥분해서 나중에 하는 말----
“심사위원들 엉터리어. 아, 전주에서 나오는 신문평에서도 극찬(?)했는디, 겨우 3등이 뭣이어. 그 심사위원 영감님들이 연극 볼 줄 몰라요! 허허.”
최 선생은 <정읍사>의 그 공연 프로그램에 쓴 “井邑詞 小考”의 글에서 당신의 해박한 국학 실력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었다. ‘정읍사의 내용은 <高麗史 樂志>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한 行商人이 행상을 나갔다가 오래 돌아오지 않으므로 그 남편을 기다리다 못한 젊은 아내가 남편이 돌아올 길을 바라보며, 혹시 밤길을 가다가 해를 입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면서 진흙탕 물에 비유하여 지어 부른 그리움의 노래라 여겨진다.-- ’

두 번째 인연은 1995년의 일로서 대전광역시의 위촉을 받고, 이벤트 연극 <인동장터의 함성>(임영주 연출/ 한수정 주연)을 퍼포먼스한 것이다. 대전시를 흘러가는 냇가의 천변에 그 옛날엔 ‘인동장’이 있었는데, 지난 3.1운동 때는 그곳 장터에서 ‘독립만세 운동’이 크게 일어났던 곳이란다. 그래서 ‘광복 50주년 3.1절 기념’ 야외공연을 현장에서 개최하기로 정하고, 작품 청탁이 본인에게 와서 나는 시 관계자 및 연출자 임영주씨와 함께 현장답사를 한 것이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그 이벤트 공연은 매우 성공적이어서 다음 번 해에도 재공연되었다고 한다.

셋째번은 지난 1999년의 일. 그해 10월에 개최된 제17회 “한밭문화제”에서 대전연극협회(회장 도완석)가 합동공연으로 나의 창작신작 <千年의 바람>(채윤일 연출/ 이종국 주연)을 초연해 준 것이다. 이 공연 역시 전문인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얻었던 모양인데, 그 덕택에 서울에 있는 본인으로서는 제7회 “大山文學賞”을 수상하게 됨으로써 그 보람과 영예를 더하게 되었다.

이래저래 최 선생과 나의 교분 인연은 길다면 길고 깊다면 깊은 것이다. 결코 크다고는 할 수 없는 아담한 체구에 까무잡잡한 피부 색깔과 부리부리한 눈망울,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서울에 살고 있는 나에게 지금도 금새 들려오는 것만 같다. 최 선생님, 세수 77년 ‘喜壽의 해’라니 정말 세월 빠르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나 노경식도 어느새 경로의 나이를 훌쩍 넘어선 것 아닙니까? 허허.
죽헌 최문휘 선생, 그곳 대전에서 열리는 자랑스런 희수잔치를 멀리서 지켜보며, 장차 더욱 온가족의 평안과 건승을 기원하는 바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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