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경북을 통틀어서 ‘연극인 김삼일’ 하면, 그곳에서 연극 문전을 들락거리는 사람 치고 그를 모르는 이가 아마도 없으리라. 그것은 3, 40년 전의 나이 먹은 연극인들은 그와 더불어서 척박한 영남연극의 밭을 함께 일궈낸 사실에서, 그리고 후배 연극인은 그의 연극연출을 지도 받고 가르침을 배움으로써 알게 모르게 직간접으로 김삼일씨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았을 것이라는 뜻에서이다. 그만큼 연극연출가 김삼일은 마당발이고 소탈하고 서민적이다. 왜냐면 그는 지난 40여 년간을 한시도 연극 언저리를 떠난 적이 없었으며, 또한 그 자신이 연극현장에서 끊임없이 현역으로 활동하면서 오늘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사람이 한 분야에 몸 담고 살아가면서 그와 같이 한결같기를 바란다는 것 또한 쉽지 않은 터에, 김삼일씨야말로 참으로 무던하고 믿음직스럽고 대견하다는 생각이다. 그런 김삼일씨를 내가 알게 된 것은 1980년대 초의 일. 느닷없이 그는 서울에 사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본인은 경북 포항에서 활동하고 있는 극단 銀河의 연출자 김 아무개인데, 평소에 노경식을 잘 알고 있으며 나의 작품 <부자>(父子)를 공연하고자 작가의 승낙을 바란다는 사연. 그때의 연극계 관행(?)에 의하면 원작자의 공연승낙 여부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던 시절인데, 난 그런 소식을 알려준 것만 해도 그냥 고맙다는 생각에서 무조건 ‘OK!' 그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때 이미 포항방송국에서 기자생활을 하고 있었던 탓인지, 그처럼 매사에 충실하고 사실에 빈틈없는 확실한 인물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김삼일은 갈데 없는 경상도 촌놈(?)이다. 언제 보아도 꾸부정한 어깨에다 아무렇지도 않게 걷는 팔자 걸음걸이에 별로 폼 낼 줄도 모르는 늘상 점퍼 차림의 입성, 그리고 전형적인 심한 경상도 사투리 등등. (저런 발성으로 성우 노릇을 어떻게 했을까? 사회의 첫걸음을 그는 포항방송국 성우에서부터 시작하였다고 함) 허나 그의 약간 매부리진 코는 그의 의지와 신념을 돋보이게 하고, 그의 눈빛은 총명하고 재기 발랄하다. 그는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 만나도 십년지기처럼 편안하고 친숙하다. 마치 엊그제 만난 사람처럼 친절하고, 재미나는 화제를 끌어갈 줄 안다. 김삼일은 중앙과 지방을 가릴 것 없이 연극계의 굵직한 현안에서부터 어느 누구의 시시콜콜한 개인 사정에 이르기까지 그의 머릿속 레이터망에는 모든 것이 걸려 있다. 그래서 좌중의 화제를 풍성하게 이끌어낸다. ‘노 선생님, 서울에서 요런저런 소식이 있든디 고것이 참말인교?’ 그러자 내 대답은, ‘난 금시초문인데? 누가 그럽디까?’ 그러면 그 역시 소탈하게 웃으며, ‘아니- 그냥 들었슴니더! 하하--’ 그렇게 되면 우리들의 얘기는 콩팔칠팔 신나게 이어지기 마련. 아마도 그것은 그가 방송국 기자의 습성에서 온 모양이다. 내가 연극인 김삼일씨를 정작 친숙하게 알게 된 것은 포항에서 열린 제7회 전국연극제(89년, 위원장 신상률) 때의 일이다. 때에 난 유민영 김동훈(작고) 선생과 셋이서 중앙 심사위원으로 내려간 것. 그래서 김삼일은 이때 <산불>(차범석 작)을 가지고 경북 대표팀으로 경연에 참가해서 “연출상”을 수상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김삼일씨가 연극연출가로서 더욱 빛난 것은 그보다 4년 앞서 청주에서 개최되었던 제3회 전국연극제(85년)에서 경북 대표팀 포항의 ‘극단 은하‘에게 영예의 “대통령상“(대상)을 안겨준 <大地의 딸> 때가 아닌가 한다. 그때도 역시 출품작은 차범석 선생 것으로 ”활화산“을 개명한 작품이며, 연출은 김삼일씨였던 것. 이와 같이 그의 일련의 연출작품들을 따져보면, 그는 리얼리즘 연극 계열의 연출가임을 익히 알 수 있겠다. 내가 아는 김삼일씨는 이해랑 선생님을 철저하게 사숙해 온 연극인이다. 앞서도 말했다시피 김삼일은 리얼리즘 연극의 신봉자이다. 여기서 연극연출가 이해랑 선생과 김삼일씨에 얽힌 일화 한 대목을 들은 대로 소개할까 한다. 이 얘기는 이 선생께서도 생전에 살아계실 적에, 뒷구멍으로 김삼일씨 본인에게서 들은 것. 그러니까 1985년 청주 전국연극제에서 <대지의 딸>로 대상을 수상하고 나서의 일이란다. 이때의 전국연극제 심사위원장은 이해랑 선생님. 김삼일씨는 출연배우 및 단원들과 함께 서울에 있는 이 선생의 남현동 자택을 인사차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선생님과의 오래 전 옛날 인연을 실토하게 되었단다.
‘선생님요, 저- 있잖습니까. 옛날에 선생님께서 운영하셨던 ’이해랑 이동극장‘말씀임니더.’ ‘그래, 이었지. 60년대 중간쯤에. 그런데, 왜?’ ‘그해가 1966년도였슴니더. 제가 그때 저- 포항 촌구석에서 올라와가, 극단 단원모집에 응모했었는디 불합격으로 톡- 떨어져 버린 적이 있슴니다요.’ ‘허허, 김군과는 그런 인연도 있었나!--’
사연인 즉슨 김삼일은 그때 포항KBS에서 일하고 있으면서 신상률 선생과 함께 극단 은하를 창단하는 등 연극활동에 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우연찮게 한국일보의 신문 광고란에서 “이해랑 이동극장” 단원모집 광고를 보고는 무작정 상경하여 응모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청운의 뜻을 품고. 그러자 이 선생님께선 김삼일에게 말(경상도 사투리)을 시켜보기도 하고, 이리저리 이력서를 한참 눈여겨보시더니만 당신 특유의 조용하신 음성으로,
‘김삼일군, 연극이란말야. 반드시 서울에서 활동해야만 좋은 건 아냐. 보아하니 김군은 직장도 괜찮고, 연극예술에 대한 열성이 대단해. 그러니까말야. 자기네의 고장, 즉 지방에서 연극예술을 열심히 활동하는 것도 얼마나 보람차고 좋은 일이겠나? 내 말뜻을 알아들었겠지? ----’
대개 이런 뜻의 말씀으로 점잖게 불합격의 퇴짜를 맞은 적이 있었노라고, 김삼일이가 이 선생님께 자초지종을 차근하게 설명드렸다는 것. 그런데 이 선생님으로선 그 당시의 일을 기억조차 할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김삼일의 마무리 말--
‘그때가 1966년도였으니까 꼭 19년 전 일입니다요, 선생님. 그러니까 19년 후에야 이렇게 선생님을 직접 뵙게 돼서 영광스럽고, 또 큰상까지 주셔서 무척이나 감사함니더,’
그러자 이 선생께선 아무런 말씀도 없이 뜸을 들이시더니,
‘으음, 그런 적이 있었나? 그런데 김군은 지금도 그 방송국에 다니나?’ ‘예, 선생님. 포항KBS에서 방송부장으로 일하고 있슴니더.’ ‘그것 보라구. 허허. 그래서 지금에 김군이 대성한 것 아닌가? 하고 싶은 연극도 꾸준히 계속해서 이렇게 상도 탈 수 있게 됐고말이야. 김군 축하해요! 허허허. ----’
김삼일씨는 이때 이해랑 선생님의 그 멋들어진 임기응변과 진솔함을 결코 잊을 수 없다면서 자랑스럽게 얘기하곤 한다. 그러고 김삼일은 평소에 또 자랑하는 것이 한 가지가 더 있다. 비록 시골에서 활동하므로 직접 가르침을 받을 기회는 없었으나, 이해랑 선생을 한국 리얼리즘 연극의 대가로 모시고 언제나 숨어서(?) 몰래 공부해 왔었다는 것. 가령 서울에서 <밤으로의 긴 여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같은 순수 리얼리즘 연극을 선생님이 공연하게 되면, 밤기차 타고 서울에 올라가서 몰래 구경한다든지, 또는 책방이나 누구 아는 사람을 통해 극본을 구해서 열심히 읽어보고 생각하고 공부를 했었노라고 그는 자랑 아닌 자랑을 늘어놓는다. 그런 의미에서 김삼일씨는 이해랑의 연극정신을 이어받은 연극인이라고 해서 결코 틀린 말은 아닐게다. 내가 알고 있는 김삼일씨의 얼굴은 세 가지. 그는 리얼리즘 연극만을 철저하게 신봉하는 연극연출가이자, 대구 KBS방송국(취재부장)의 민완기자, 그리고 그 방송국을 그만둔(정년퇴임) 후로는 오늘의 대경대학 연극영화과 교수 등등---- 허나 당신의 본업이 무엇입니까 하고 누군가 묻는다면 지체없이 그는 “연출가”라고 확실하게 답변해 올 것이다. 김삼일은 철 들어서 연극으로 벌써 입문하였고, 연극으로 지금껏 살아왔으며, 연극으로써 앞으로도 인생을 정리하려 하고 있기 때문. ‘저세상’에 계신 이 선생님께서 오늘의 이런 말씀을 듣고, 또한 당신 이름의 상을 김삼일에게 준다고 들으시면 요번엔 또 무슨 말씀을 어떻게 하실까?
‘그래그래, 김삼일군! 연극 중단하지 말고 열심히 잘해 봐요. 축하해. 허허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