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열희곡집 9권]에 부쳐 |
머리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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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예술의 생수터’를 바라며
노 경 식 (극작가)
흔히 하는 말로 耳順의 나이 60도 채 못넘긴 채, 무엇이 그리도 바빴던지 홀연히 저세상으로 떠나간 극작가 김상열씨를 생각하면, 상기도 못내 가슴이 아리고 애잔하며 서글픈 마음 금할 길이 없다. 진정 그의 떠나감이야말로, 그가 그처럼 사랑하고 소중히 아꼈던 가족과 친지들의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일 뿐만 아니라, 한평생 을 몸 바쳐서 그가 정열적으로 살았던 우리 공연예술계의 큰 아쉬움이요, 일대 손실이라고 아니할 수 없을 터이다. 그런 그가 세상을 하직한 지도 어느새 5년 세월이란다. 나는 우리의 연극인 그 김상열이가, 아마도 ‘구룡소극장’- 지금은 없어졌지만- 이나, 어느 곳 한쪽에 숨어 열심히 새 작품을 만들어 가지고는, 어느 땐가 또 갑자기 우리들의 연극무대에 화려하게 돌아오겠거니 하는 착각과 기대(?)를 지금도 문득문득 떠올리곤 하는 때가 종종 있음이다. 그렇다면 연극인 김상열씨의 빈자리는 그만큼 우리의 연극계로서는 그 무게와 위치가 크고 깊다고 할밖에---- 생각할수록 마음 한구석이 찡- 하고, 아쉬움이 많은 김상열 연극인이다. 김상열씨의 못다 이룬 유업은 그의 아내 한보경과 친지들에 의해서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 해서 <김상열 희곡집> 제9권이 목하 만들어지고 있으며, 그 책머리에다가 어쭙잖은 내 글 한 편을 써 줄 것을 한보경씨가 손수 부탁해 왔다. 평소에 김상열씨와 나 사이는, 그렇게 깊은 교분을 나누었던 처지는 아니다. 그러니까 그는 극단 가교와 현대극장, 그리고 그 자신이 창단한 극단 神市에서 주로 활동하는 입장이었으니, 나와는 함께 작업을 벌인 적이 별로 없었다. 더구나 그는 극작가이자 연출가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해서 한몫에 연극작업을 행하는 처지였으니까, 엉터리 작가(?) 노경식으로서는 끼어들 자리가 전혀 없었던 셈이다. 그러나 김상열씨는 어느 때 어느 자리에서든지 서로 만나기만 하면, 나를 가리켜 반갑게, 스스럼없이 “형님-- 형님”이라고 호칭하여 불렀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자기보다는 서너 살 터울로 연상이었으니까. 그러고 나서는 그 하얗고 윤곽이 뚜렷한 잘 생긴 얼굴 모습과 약간은 어눌한 듯한(?) 큰목소리의 말투로 웃으면서, “형님, 언제 쐬주나 한잔 나눕시다!” 그러면 나의 대꾸 역시, “그래애. 좋지, 좋아요. 허허허----” 이렇듯 김상열씨와 나와의 관계는, 그 힘들고 고단한 연극예술의 같은 한길을 가는 동학로서, 서로간에 아끼고 존경하고 믿음이 가는 사이였다는 것이 온당한 표현일 것이다. 각설하고, 이번 희곡집의 목차를 보니까 서울연극제 수상작 (92년) <오로라를 위하여>를 비롯해서 <달빛처녀>(樂浪人 嘉羅田), ‘구룡소극장’ 개관작인 <싯달타> 등 눈에 띄는 작품들이 들어 있다. 그 당시 ‘구룡소극장‘의 개관에 즈음하여, 김상열씨는 “문화의 약수터”가 되고자 한다고 포부를 밝히고 있다. 비록 그 소극장이 지금은 발전적으로 없어졌으나, 그의 연극정신은 오늘에도 살아있다는 생각이다. 이에, 그의 글 한 토막을 인용하면서, ’김상열 연극사랑회’의 무궁한 발전을 한번 더 빌어마지 않는다. “구룡소극장 밑에는 구룡사 약수의 근원이 흐르고, 구룡소극장 위에는 지존하신 부처님이 가부좌를 하고 계시다. 두 개의 절대절명한 진리 사이에서 ‘극단 神市’와 ’구룡소극장‘은 맑고 깨끗한 소리를 전하여 문화예술의 파이프가 되고자 한다. ----“
2003년 5월, ‘가정의 달’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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