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범석- 나의 문학의 뿌리' |
座長(사회)의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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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집 서울" <수요문학광장>에서--
문화산업에 묻혀버린 순수문학예술
노 경 식 (극작가)
“내가 태어난 1920년대 중반, 유소년 시절에 전남 목포에서 제일보통학교(지금의 북교초등학교)를 다니고, 이어 광주로 나아가서 광주고등보통학교(오늘의 광주서중)를 다니는 등, 난 8.15 해방 무렵까지는 비교적 유복하고 순탄한 성장기를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상황을 보면, 일제의 식민지로서 정치적 압제와 온나라의 가난으로 인한 경제적 궁핍, 그리고 소위 ‘대동아전쟁’이라고 불리는 ‘태평양전쟁’ 등 혼돈과 암흑의 각박한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나의 어린시절은 이중의 정치적 사회적 모순 속에서 보내진 것입니다. 내가 태어난 땅과 몸뚱이는 분명코 조선사람 조선땅인데, 교육과 사회문화는 온통 일본제국주의, 일본적인 것, 천황주의적인 것의 일색이었어요. 학교에 가면 우리 말이 아닌 일본어로 읽고 써야 하며, 모든 생각과 의식 행동도 일본식으로 해야 하는 등등-- 말하자면 나는 한 85%쯤의 일본인으로 키워진 셈이라고 할까요? 그러다가, 일제의 징병제 제1기생으로 군대영장을 받고 제주도훈련소에서 ”해방“을 맞은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고백하건대, 나의 의식 속에는 사실 진정한 의미의 ”해방의 기쁨‘ 같은 것을 몰랐다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집으로 돌아와서야, 귀향해서 비로소 “진정한 해방”을 알아차린 셈입니다. 말하자면 나의 인생과 의식은 그때부터 백팔십도, 그제서야 뒤바뀌고 달라지고, 새로운 눈뜸이 시작된 것입니다. 지난 98년에 출판된 내 자선전 <떠도는 山河>에서도, 그래서 ’나의 제2의 인생‘이라고 표현했었습니다만----“ 극작가 차범석 선생(예술원 회장)의 문학강의 “나의 문학의 뿌리”는 이렇게 첫 화두를 꺼내신다. 좌장(노경식)의 진행으로, ‘문학의 집 서울’의 이사장 시인 김후란님의 인사말과, 좌장의 차선생님에 관한 간단한 약력소개에 이어서, 한 시간 20여 분 동안의 선생님 말씀은 이렇게 꼭지를 딴 것이다. 원로수필가 전숙희 선생을 비롯해서, 문학평론가 윤병로씨, 세종문화회관의 총예술감독을 지낸 예술행정가 이종덕씨, 소설가 이규희씨와 김청자씨, 희곡작가 김대현씨(한국희곡작가협회 이사장) 등등, 그리고 많은 문학애호인과 젊은 문학예술인들이 자리를 가득 메워서, 주최측 말에 의하면 대단한 성황이란다. 차 선생의 열정적이고 자상한 말씀에 대하여, 듣는 이들은 숨을 죽이고 경청하느라 분위기는 자못 진지하고 엄숙하기까지 한다. 차 선생의 작품상의 소재와 뿌리는, 늘상 당신이 살아가는 시대의 이중성과 사회적인 모순갈등, 그리고 동시대 역사 속의 삶의 고통과 아픔이 주된 관심사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귀향>과 <밀주>, <山불> <갈매기떼> <학이여 사랑일레라> 등 토속적인 고향마을 이야기와, 현대적 인 삶을 소재로 한 <껍질이 깨지는 아픔 없이는>과 <왕교수의 직업>, 그리고 역사물로서는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 선생 일대기를 묘파한 <꿈하늘>을 비롯하여, <식민지의 아침>과 <통곡의 땅> 등등이 바로 그것이다. 차 선생의 꼿꼿하고 예리하신 말씀은 문학예술이 처하고 있는 오늘의 현상황과 세태로까지 이어진다. 순수하고 절대적인 문학예술이란 “문화사업”이라는 이름의 경제적인 자본논리에 잘못 휘들리거나 침식되어서는 절대로 아니된다는 것. 문화산업은 어디까지나 순수문학예술의 하나의 결과물이요, 응용분야일 뿐이다. 마치 수학이나 물리학의 기초학문이 응용과학인 우주선과 로케트를 만들어낼 수 있듯이---- 약 두 시간에 걸친 차 선생님의 ‘문학광장’은 청중 한두 분의 ‘질문’을 받는 것을 끝으로, 재미나고 뜻있는 시간을 마무리하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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