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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식의 짧은 글 및 에세이입니다.
황순원 선생님의 주례 은고 권두언- <소나기마을>
 
[권두언]

황순원 선생님의 主禮 恩顧

노경식 (극작가)

2, 3년 후면 반백년이 훌쩍 흘러간 세월이다. 1960년대에 지금의 「남산예술센터」가 그 시절엔 「드라마센터」 이름을 갖고, 그 한쪽 구석에 ‘드라마센터 예식장’을 경영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드라마센터가 개관하고 나서 몇 년이 못되어 재정난에 봉착하게 되자 유치진 선생(운영자)께서는 한 업자에게 세를 내놓게 돼서 어쩔수 없이 생겨난 미봉의 기현상이었던 셈.
때에 나는 경희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나서 뜬금없이(?) 드라마센터 「연극아카데미」 극작반과 「한국극작워크숍」(여석기 교수 지도)에 들어가서 희곡을 수강하고, 서울신문사 65년도 신춘문예에 희곡 <철새>가 당선되어 햇병아리 작가에 입문하고 있었다. 나는 밥벌이를 위해 아무개 출판사의 편집부에서 일하는 한편, 시간만 나면 남산 드라마센터를 오르내리곤 했었는데 어쩌다가 장가를 가게 되는 일생 일대의 큰일이 벌어졌다. 해서 나는 동랑 선생께는 우선 예식장을 좀 싸게(?) 빌리도록 부탁말씀을 올리고, 주례 선생은 황순원 교수님을 모시기로 심중에 작정하고 나서, 건방지고 무엄하게도, 그것도 또한 스스로 직접 찾아가 뵌 것이 아니라 공중전화 한 통화로 무턱대고 사정 말씀을 올렸던 것이다. 선생님께서는 그러자 웃으시면서 쾌히 승낙하셨던 것. 소설과 시 문학작품 외에는 그 어느 것 한가지도 ‘잡문’(雜文)은 일체 사양하고, 『현대문학』의 신인작가 추천도 매우 엄격하고, 더군다나 결혼식 주례 같은 일은 거리를 두고 까다롭기로 소문난 어른이, 국문학과 제자도 아닌 경제과 출신의 제자한테 주례를 서주신다니 있을 법한 일인가!
선생님과 나의 문학인연은 대학 재학생 시절로 돌아간다. 대학교 1, 2학년 때는 인문교양을 위해 학기마다 ‘교양국어’ ‘교양영어’ 같은 과목이 있었다. 그런데 경제학과 우리의 ‘교양국어’를 국문과의 황순원 교수님이 맡게 되었다. 소설가 황순원이 누구인가? 일찍이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서 그 유명하고 멋진 <소나기> 작품을 배운 처지가 아닌가. 우리들은 더할 수 없이 자랑스럽고 고마웠다. 그것도 1, 2학년을 4학기 동안이나. 그러고 어찌된 셈인지 우리들 경제과 학생 몇이서는 여름 겨울 방학 무렵이면 반드시 소주나 정종 한 병을 사들고 남산 회현동에 있는 선생님 댁을 찾아들곤 했다. 선생님은 반갑게 맞아주시고, 경제과 학생들이 경제과 교수를 찾아가야지 국문과 교수를 찾아와서 되는 일이냐고 매양 소탈하게 웃으셨다. 물론 우리가 갖고간 술 한 병쯤은 다만 시작일 뿐 실컷 우리들은 취토록 얻어마시고, 사모님의 그 기름진 음식솜씨에 흠뻑 반해서 버릇없이 떠들어대곤 했었다. 그때 나는 ‘대학주보’에 수필 <하와이>를 투고한 적이 있었는데, 선생님이 그걸 읽으시고 강의시간 하나를 온통 격려와 칭찬으로 마치신 적도 있었다. 그러면서 만날 때마다 꼭 하시는 말씀, “노군, 자네 글 잘써요. 글 한번 써보라구 -- ”
내가 문학연극의 길에 들어선 데는 네 분의 은사님이 계신다. 대문호 황순원, 동랑 유치진, 연극평론가 여석기, 그러고 연극연출가 이해랑 선생 등. 나는 일평생 이들 선생님의 은고(恩顧)와 사랑을 결코 잊지 못한다.
1966년 5월 27일. ‘드라마센터 예식장’을 찾아서, 봄 바바리 코트를 날리며 남산 언덕 길을 터벅터벅 걸어 올라오시는 선생을 유치진 선생님이 문 밖에까지 나와 반갑게 맞이하셨다.
“어서 오시오, 황순원 선생. 허허”
“이런 주례는 동랑 선생께서 하시는 일 아닙니까? --”
황 선생님께서 이따금 하신 말씀을 나는 상기도 잘 기억하고 있다.
“노군, 나도 연극 했어요. 옛날엔 나도 「동경학생예술좌」 단원이었다니! 허허.”
그것은 일제 때에 당신의 학창 시절 와세다(早稻田)대학 영문과에 유학하고 계실 때의 일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었다. 선생님 그립고 또 그립습니다. (20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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