喫茶去! |
수필 |
| |
[대산문화] 6호-- "글밭단상"
끽다거(喫茶去)
엊그제 서울시극단이 봄공연 작품으로 무대에 올린 번역극 「크루서블 The Crucible」을 감상했다. 잘 아다시피 희곡 「크루서블」은 미국의 세계적인 극작가 아서 밀러(Arthur Miller 1915∼1980)의 1953년 초연작으로 벌써 반세기에 가까왔건만, 오늘날에도 더욱 빛을 발하고 있는 모양이다. 공연 프로그램에 적혀 있는 작품연보를 살펴보니, 지난 1990년도에는 뉴욕과 런던에서 재공연되고, 1996년엔 극영화로 제작(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위노나 라이더 주연으로 국내에도 비디오로 출시되었음)되었으며, 올 봄에는 또 뉴욕 버지니아극장에서 재공연하였다고 되어 있다. 비단 그 정도 뿐이랴. 전세계의 극장과 학교에서의 공연횟수는 수도 없이 많았을 것이라 짐작된다.
뿐만 아니라, 「크루서블」은 우리나라에서도 몇 차례 공연한 바 있었다. 내가 알기로는 '극단 성좌'에서 오래 전에 「시련(試鍊)」이란 작품명(권오일 연출, 세종문화회관별관 지금의 시의회의사당)으로 공연되었고, 또한 수년 전에는 고려대학교 연극동우회가 '모교 80주년 기념작품'(김성옥 손숙 주연)으로 대학로의 문예회관대극장에서 공연해서 대성황을 이루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때 역시 작품 이름은 「시련」이었는데, 그것은 원제목 'Crucible'이 일반적으로 '도가니, 혹은 금속을 녹이는 단지'라는 의미가 아니고, 중세 라틴어에서 어원을 가져 온 '호된 시련'을 뜻하는 것이라고 한다.
흔히들 아서 밀러라고 하면 그의 대표작 「세일즈맨의 죽음」을 떠올리기 일쑤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크루서블」도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장막극 「크루서블」은 비천하고 힘 없고 선량하며 보잘 것 없는 한 주인공 농부(존 프록터)가 거대한 사회적 권력의 횡포와, 어처구니없는 음모와 위선에 맞서서 온몸으로 투쟁하고 고뇌하며, 끝내는 자기파멸의 길로 죽어가는 비극적인 일상적 삶의 이야기이다. 그것은 곧 고귀한 신분의 외디푸스왕이나 햄릿왕자 같은 장엄하고 고전적 비극이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소박한 소시민의 뼈아픈 죽음으로서, 현대비극의 자랑스런(?) 영웅상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나 자신의 작품경향과 취향에서인지는 몰라도, 현대인의 병든 내면세계를 심도있게 천착하는 테네시 윌리암스보다는, 시대상황과 인간의 사회적 삶을 즐겨 다루는 아서 밀러쪽을 더욱 선호한다고나 할까.
「크루서블」의 시대상황과 인물은 17세기 말엽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황량한 어촌마을 세일럼을 배경으로 발생하였던 '마녀사냥' 이야기이다. 아서 밀러는 이 줄거리를 소재로 하고, 1950년대 미합중국의 조야(朝野)를 들끓게 했던 매카시즘(McCarthyism)을 비판하고 있다. '맥카시즘'이란 그 당시 극심한 미소냉전의 독버섯적 산물로서, 이른바 적색분자 '빨갱이 사냥'을 위해서 온 미국 사회를 배신과 증오와 밀고가 난무하는 혼탁의 시대로 몰아갔던 것이다. 물론 밀러 자신도 그의 사회주의적 성향 때문에 미 의회가 주도하는 '비미(非美)활동위원회'에 소환되어 심한 고초를 겪었던 일은 익히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바야흐로 그 심란하고 비극적인 매카시즘적 망령이 되살아나서 우리들을 혼란케 하려 한다. 이것은 어쩌면 치유되지 못한 채, 우리들이 안고 살아가는 분단상황의 쇠사슬이고 끈질긴 고질병인가. 매카시즘의 그 가증스런 '마녀의 그림자'가 반세기 지난 지금까지도 죽지 않고 살아남아서 활개칠 수 있다니! 참으로 부끄럽고 어리석고 서글픈 일이다.
우리 모두 제발 평상심(平常心)으로 돌아가, 그 옛날 조주선사(趙州禪師)님의 말씀처럼 : "끽다거"(喫茶去)! - 차나 한잔 들고 가시게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