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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식의 짧은 글 및 에세이입니다.
허규- "천하장군"처럼 추모글
 
[허규 선생 추모글]

“천하대장군” 장승처럼

노 경 식 (극작가)

오래오래 기억되어야 할 연극인 허규 선생이 타계하신 지 어느새 1주년이 가까워온다. 그는 익히 알다시피 서울대 농과대학을 수학하고 있던 학창시절부터 학생극운동에 뛰어든 이래, 한국연극의 좌표는 ‘연극을 통한 인간성 회복과 민족 전통예술의 현대적 조화’라는 신념과 웅지를 가지고, 오로지 북 치며 무대에서 살고, 공부하고 연구하고 창조하고자 노력하면서 뜨겁게 살다간 우리들 동시대의 빼어난 연극인생이었다.

나와 허 선생과의 연극인연은 별로 내세울 것이 없다. 다만 나는 연극인의 후배작가로서, 실험극장의 명동시절이나, 극단 민예극장의 신촌시절이라든지, 또는 장충동의 국립극장(장) 시절에, 오며가며 먼발치에서 빙그레 웃고 손 잡아보는 것이 고작이라면 고작이었으며, 어쩌다가 독대(?)라도 할 짬이생기면-- 특히 극장장 시절에-- “노형, 소주나 한잔 하고 점심 합시다” 하는 것이 허 선생 당신과의 일상사였다.

그런데 곰곰이 돌이켜보니, 허 선생과 나와의 연극인연이 전혀 무위였던 것도 아니다. 때에 극단 민예극장은 아현동 고갯마루 턱의 초라한 소극장에서 이화여대 앞의 신촌 바닥으로 상설공연장 하나를 번듯하게 마련하고, 전통연희의 현대적 창조를 위한 실험실이라는 큰 기치를 내걸고 열심히 작업하던 시절이었다. 그리하여 정확하게 1979년 10월 달의 일. 그곳에서 그 두 번째 기획공연으로 105인의 연극애호인이 선정한 “6개의 단막극” 무대가 마련된 적이 있었다. 장소현의 <서울 말뚝이> 이강백 <셋> 이근삼 <거룩한 직업> 박조열 <모가지가 긴 두 사람의 대화> 윤대성 <출발>, 거기다가 노경식의 <父子 2> 등등. 그러고 매 작품마다 연출가와 연기자들도 각양각색이어서, 연출로는 손진책과 강영걸 김도훈 이윤영 김영열 등 촉망받는 젊은이들이 망라되고, 출연배우들 또한 그 시절로서는 어슷비슷한 젊은이들로, 20여 년이 흘러 오늘에 와서 돌아보면 모두가 중견연극인들이었다. 그 가운데서 내 작품 <부자>의 연출만은 허규 선생이 직접 맡았으며, 연기자로는 그 당시 국립극단의 소장배우였던 권성덕과 정상철 딱 두 사람뿐. 그 시절 “6개의 단막극” 기획공연은 흥행면이나 공연성과에 있어 매우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생각하는데, 특히 작가인 나로서는 잊을 수 없는 ‘좋은 연극’의 하나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술 주정뱅이 아버지 목수(권성덕)를 낡은 사닥다리 위에 걸터앉게 하고 그 얼간이 아들 목수(정상철)를 아래쪽에 대각선으로 배치한 탁월한 연출구도와, 두 젊은 배우의 생생한 빛나는(?) 연기는 극적 앙상블을 이뤄내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는 생각이다. 더구나 단막극을 별로 생산하지 못하고 있는 내 처지에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얼마나 속마음으로 자랑스럽고 흐뭇했던지, 때에 연출자한테 내가 한 말 --
“작품에도 없는 낡은 사닥다리를 어떻게 생각해내셨어요?”
그러자 허 선생은 빙그레 웃으면서 간단히 대답했다.
“그 시내 변두리에 있는 허름한 목공소에 가보면, 헌 사다리가 한쪽에 꼭 놓여있지 않습디까? 허허.”

그때 그 일이 연분이 되어서였던지 그 이후로 나는 극단 민예극장과 <정읍사>(정현 연출, 1982)와 <오돌또기>(심재찬 강영걸 연출, 1983) 등 장막극을 무대에 올리게 되었고, 허 선생이 국립극장장으로 옮긴 뒤로는 <불타는 여울>(이해랑 연출, 1984)과 <침묵의 바다>(임영웅 연출, 1987) 두 편을 국립극장 무대에 선을 보이게 되었던 것이다.

국립극장 그 시절의 일이다. 어느 날엔가 내가 작품 때문에 국립극장을 찾아 올라갔는데, 극장 입구의 큰길쪽 샛길 앞에서 맞닥뜨렸다. 때에 허 선생은 어디서 구해 왔는지 집채만큼이나 큰,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의 석상 두 개를 그 입구에다 세우느라고 토목공사(?)를 벌이고 있었다. 그 힘들고 무거운 것들을 인부 몇 사람과 함께 쇠줄 도르래로 잡아올리고 끌어당기고 땀을 흘리면서.
‘저 양반이 전통귀신에 홀려도 단단히 홀렸구만!’
나는 속으로 웃으면서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그 장대한 석상은 지금도 버젓이 샛길 입구에 버티고 서 있다. 아니 모르면 몰라도, 장충동 국립극장과 극예술의 수호신으로서 백년 천년 영원히 운명과 고락을 함께 하리라. 우리나라의 연극예술을 당당히 보호하고 면면히 빛내고자 --

‘전통연희의 현대적 창조’라는 허규 선생의 이념과 정신은 그 뿌린 씨앗이 너무 막중하고, 깊고 넓고 크다는 생각이다. 우리 허 선생은 오늘날에도 국립극장 입구의 “천하대장군”처럼 버티고 서서 언제나 지켜보면서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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