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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식의 짧은 글 및 에세이입니다.
'장충동 시대의 창작극 무대' 논설
 
[국립극장 50년사] 중에서-- (노경식)

올해 2000년은 국립극장 창설 5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다. 익히 알다시피 "민족예술의 발전과 연극문화의 향상을 도모하고 국제문화의 교류를 촉진하기 위하여 국립극장을 설치한다." (목적)는 원대한 포부와 이상을 안고 신생 대한민국의 예술문화 창달의지를 밝힌 것이 1950년 봄의 일이니, 그로부터 반백 년에 긍한다.

국립극장은 그의 개관 기념공연으로 유치진 작 <원술랑>을 허석 연출로 일정 때의 부민관(지금의 서울시의회 의사당) 자리에서 첫 고고의 소리를 울려 불과 1주일 동안 공연에 5만여 명의 관객을 동원함으로써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였다. 실로 연극예술의 앞날에 장미빛 서광이 비치는 듯했다. 그리고 두 번째에서도 중국의 현대극 <뇌우>(조우 작/ 유치진 연출)를 공연하여 또다시 히트하고 앙코르 공연까지 포함해서 7만 5천여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때에 주인공 원술랑 역을 맡았던 원로배우 김동원 선생의 회고담에 의하면 "당시 40여 만 명이었던 서울 인구의 6분의 1이 이 연극을 관람한 셈이니 우리 연극사에서 전무후무한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 <뇌우>의 앙코르 공연 폐막 이틀 뒤에 불행하게도 민족상잔의 비극인 6·25 전쟁이 터지게 되고 그로부터 국립극단(장)은 시련과 유랑과 인고의 세월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저 간판 달고 유명무실하게 명맥만을 유지해온 대구 피난시절과 57년 국립극단의 환도 후로 서울시공관의 곁방살이로부터 시작된 16년간의 '명동시대' 그리고 73년 가을 남산 자락에 터를 잡고 어엿한(?) 새 집을 지어서 옮겨 살게 된 오늘날의 '장충동 시대' 등등이 그 우여곡절 많은 국립극단의 대체적인 궤적이라고 하겠다. 국립극단의 '장충동 시대'는 지금까지 햇수로 27년의 세월을 헤아린다. 필자에게 맡겨진 편집자의 주문은 '장충동 시대의 창작극' 이야기이다. 따라서 필자는 매우 엉성하게(?) 마련된 「국립극단 공연연보」를-그런 점에서 우리의 기록성에는 문제점이 많다-토대로 하고 동시대를 살아온 연극인의 한 사람으로서 필자가 보고 겪었던 기억을 더듬어서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2 장충동 국립극장의 개관작품 <성웅 이순신>(이재현 작/ 허규 연출)은 국립극단의 제66회 공연작으로서 73년 10월 공연됐다. 그로부터 지난 99년 11월의 소극장 공연 <운상각>(오태석 작·연출)에 이르기까지 국립극장은 총 185회의 공연기록을 갖고 있다. 그러니까 장충동 국립극장은 모두 120회의 공연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셈이다.

이 중에서 75년에 무대에 오른 F. 실러의 <빌헬름 텔>(서항석 번역/ 허규 연출)과 77년 괴테의 <파우스트>(서항석 번역/ 이해랑 연출) 등 번역극(대개 27편에 35회 공연)을 빼고 나면 창작극은 총 68편이 된다. 공연 횟수에서 단순 비교하면 대략 절반 가량이 창작극인 셈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점은 번역극이나 창작극을 가릴 것 없이 특정작품에 따라서는 두 번 세 번씩의 공연횟수를 중복하여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령 오영진의 <맹진사댁 경사>는 5회 공연으로 최다이고-다섯 번 모두 김상열 연출이다-<파우스트> 4회를 비롯하여 <물보라> 4회, <남한산성>과 <비옹사옹>, <꿈하늘>, <피고지고>, <무의도기행>이 각각 3회씩이다. 그리고 2회 공연작품은 수도 없이 많다. 번역극으로는 <천사여 고향을 보라>, <동쥐앙>, <들오리>, <뇌우>, <간계와 사랑> 등이며, 창작극은 <성웅 이순신>을 비롯해서 <세종대왕>, <불타는 여울>, <내일 그리고 또 내일>, <팔곡병풍>과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어이> 등이 그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점은 이들 여러 작품들이 그 공연성과 및 작품의 질과 우량성에 있어서 과연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공연기획에 있어 너무나도 안이하고 행정 관료적으로 무성의한 것은 아니었는지 한번쯤 반성하고 재음미해볼 일이다.

창작극 총 68편(이승규의 <약속> 포함)을 다시 세분해보면 이 가운데 '옛날 작품'은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어이>(최인훈 작/ 김정옥 연출)와 <소>(유치진 작/ 장민호 연출), <초립동>(한로단 작/ 임영웅 연출), <인생차압>(오영진 작/ 이해랑 연출), <맹진사댁 경사>(오영진 작/ 김상열 연출), <혈맥>(김영수 작/ 임영웅 연출), <무의도 기행>(함세덕 작/ 김석만 연출) 등 7편이다. 필자의 '옛날 작품'이라는 말이 우리의 고전을 폄하하자는 뜻이 아님을 양지하기 바란다.

그리고 원작소설을 각색한 작품으로는 안수길의 <북간도>를 비롯하여 <객사>, <무녀도>, <태평천하>, <제3의 신> 등 5편에 이른다. 그러니까 이들 12편을 제하고 나면, 순수 창작신작은 56편이 지난 27년 동안에 생산되었다. 산술 평균적으로 치면 해마다 1년에 2편꼴로 무대에 오른 셈이다. 그렇다면 한 개 극단으로서는 결코 작은 숫자는 아닌 것이다.

3 다음으로, 이들 창작신작을 작가별로 구분하여 검토해보자. 얼핏보아 대개 세 그룹으로 대별된다. 오늘날의 원로작가 그룹인 차범석과 하유상, 이근삼 등이 첫째이고 두 번째는 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사이에 등단한 중견 그룹으로서 신명순, 이재현, 김의경, 노경식, 윤조병, 오태석, 이강백 등 7인이다. 이들 중에 특히 이재현(65년 <바꼬지>)과 윤조병(67년 <이끼낀 고향에 돌아오다>), 오태석(68년 <환절기>) 등 3인은 명동국립극단 시절에 '장막극공모'를 통하여 발굴해낸 쟁쟁한 작가들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80·90년대로 이어지는 신진작가 그룹이 그 뒤를 잇는다. 이들은 대개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장막극 공모제'를 장충동 시대에 다시 시작함으로써 등단한 작가군이다. 80년도의 당선작가 이병원(<무언가>)을 시작으로 하여 정성주(<어떤 날>), 김진희(<바리더기>), 강추자(<공녀 아실>), 김광림(<홍동지는 살어있다>), 정우숙(<푸른 무덤의 숨결>), 최현묵(<불>), 오은희(<귀로>), 우봉규(<눈꽃>), 김지연(<무주별곡>), 송미숙(<아노마>) 등 11명이다. 이들 중에 김광림, 최현묵, 오은희, 송미숙을 제외하면 그 뒤로는 별로 활동이 눈에 띄지 않는다.

물론 작가 자신에게도 문제는 있겠으나, 단순히 일과성 행사로써 국립극단은 그저 신생아를 낳아만 놓고 기르는 데는 등한히 한 것이나 아닌지 안타까울 뿐이다.

또한 90년대의 기대주 이만희(<피고지고 피고지고>, 강영걸 연출)를 위시하여 작품 한 편씩을 발표한 면면을 보면 다음과 같다. 김기팔의 <광야>(이해랑 연출), 안종관의 <객사>(이해랑 연출), 이상현의 <사로잡힌 영혼>(김아라 연출), 이청준의 <제3의 신>(임영웅 연출), 이길융의 <거북선아 돌아라>(김효경 연출), 고승길의 <허생전>, 그리고 이승규 연출의 작자미상 <약속> 등등.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는, 우리나라 희곡작가의 층이 소략하여 아직은 두텁지 않다는 점이고 둘째는, 특정작가에게 작품이 편의적으로(?) 치우친 감이 없지 않으며 셋째, 그동안 국립극단의 관료주의적 성격상 공연 기획의 미비성과 무사안일이 그것이다. 참고삼아 세 편 이상씩을 발표한 작가들을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물보라>와 <사추기>, <산수유>를 쓴 오태석이 9편, <활화산>과 <손탁호텔>, <꿈하늘>의 차범석 8편(여기에는 <페르귄트>, <친구들>의 번역 2편과 소설각색 <태평천하> 포함), <남한산성>, <함성>, <삭풍의 계절>, <반도와 영웅>의 김의경과 <징비록>, <흑하>, <불타는 여울>, <침묵의 바다>의 노경식 각각 4편, 그리고 하유상(<에밀레종>, <コ碩?, <꽃그네>)과 이근삼(<내일 그리고 또 내일>, <이성계의 부동산>, <춘향아 춘향아>), 이재현(<성웅 이순신>, <북향묘>, <세종대왕>) 등이 각자 3편 정도이다.

4 그러면 지난 27년 동안의 장충동 시대에 국립극장의 대·소극장 무대에 올려진 창작신작의 작품주제와 경향을 살펴볼 차례이다. 이미 독자도 짐작할 수 있다시피, 그 수많은 작품들 중에는 우리 나라 역사에서 소재를 가져온 역사극 작품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월등히 많았다. 개관프로인 <성웅 이순신>을 비롯해서 <남한산성>, <징비록>, <손탁호텔>, <북향묘>, <거북선아 돌아라> 등등. 그리고 또한 일제 하의 독립운동사를 다룬 <삭풍의 계절>, <흑하>, <광야>, <북간도>, <객사> 등의 시대극들도 많다. 그러나 이들 공연작들이 한결같이 우수한 작품으로서 빼어난 연극적 성과를 이룩하지 못한 점이 우리들을 우울하고 허전하게 한다. 연극평론가 유민영 씨의 표현대로라면, '쇼비즘적 성격의 역사극'이라는 지적이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왠고하니, 그동안 국립극단이 안고 있었던 관료체제적 위상과 태생적 성격에서 연유한다. 이러한 극단의 위상과 성격은 군사정권의 시대상황과 맞물려 있었다고 할 것이다. 73년의 장충동 국립극장 개관이라는 것이 그 당시로서는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 하에 이른바 '남북대화'를 앞둔 시점에서 고안된 산물이 아니던가.

예술문화를 향유해야 할 시민관객들이 들끊는 명동 거리를 뒤로하고 남산 꼭대기의 한적한 숲속에다 1천5백석짜리의 대극장과 4백석 규모의 소극장 한 개를 덩그렇게 지어놓고 '민족극의 확립' 운운하는 것은 처음부터 착각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며 연목구어 격이었다. 지난날에 원로연극인 고 이해랑 선생의 '허허벌판'이라는 말씀이 실감나는 상황이었다고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국립극장이 67년에 밝힌 5개 항의 공연방침 중에서 "민족극의 확립을 위하여 국시(國是)에 적합한 창작희곡의 상연에 치중한다."는 국립극단의 노선과 한계성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민족예술의 진흥과 창달을 '국시'에 적합한 것으로 한다니! 도대체 '국시'란 무엇이며 그 정체성은 어디에 있는가? 다분히 정치적 색깔이 농후하여 연극예술의 경직성과 타율성은 피할 길이 없었으며, 순수예술에의 길은 요원하기만 했다. 그리고 또한 국립극장 운영자의 관료체제적 행태와 행사적 성격은 설상가상이었다.

그러다보니 그야말로 '무난하고 무해 무득한(?)' 역사극 공연이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앞서 말한 대로 십수 년에 걸친 군사정권 하에서 관료중심의 극장체제와 행사성 위주의 일회용 공연에 근본원인이 있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그렇다고 필자는 그동안 가시밭길을 걸어온 국립극단의 노고와 업적을 과소평가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특히 70년대 말경에 '대극장'이 아닌 '소극장 공연'에서부터 시작된 새로운 활로찾기와 86년 <봐냐 아저씨> (A. 체홉 작/ 장민호 연출)로부터 가릴 것 없이 <천사여 고향을 보라>(한상철 번역/ 이해랑 연출)와 <들오리>(H. 입센 작/ 이해랑 연출), 오태석 작·연출의 <물보라>와 <태>, <꿈하늘>(차범석 작/ 김석만 연출), 그리고 대극장 공연의 <파우스트> 같은 많은 수작을 생산해냈던 것이다.

5 국립극단의 반백 년은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 나라 연극예술의 주춧돌이고 기둥이었다. 그동안의 극단 반세기의 업적과 성과를 필자는 세 가지로 요약하고 싶다. 첫째는 우리 창작신작의 개발이다. 명동시절 62년의 <산불>(차범석 작/ 이진순 연출)과 66년의 <이민선>(김자림 작/ 전세권 연출), 71년의 <달집>(노경식 작/ 임영웅 연출)은 각각 작자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수작들이다. 둘째는 장막극 공모를 통한 희곡작가의 발굴이다. 앞서 잠깐 언급했듯이, 64년 <만선>의 천승세로부터 연년이 <바꼬지>의 이재현, <밤과 같이 높은 벽>의 전진호, <이끼낀 고향에 돌아오다>의 윤조병, <환절기>의 오태석, <동트는 새벽에 서다>의 김용락, <환상살인>의 정하연 등이 그들이며 이런 작업은 신진작가들이 8, 90년대를 줄줄이 이어오고 있다. 셋째는 새로운 배우, 신인연기자의 양성이다. 연극예술의 꽃은 배우임을 상정할 때 새로운 배우의 양성과 탄생의 중요성이야말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은 없을 것이다.

오늘의 국립극단은 주로 배우들만의 집합체로서 연극배우의 보고이다. 한국 연극의 살아 있는 역사 장민호 선생과 백성희 선생 등 70년대의 걸출하고 빛나는 노배우들이 상기도 무대 현장에서 열정을 불태우고 계시다. 그 밑으로는 정상철 단장을 중심으로 한 4, 50대의 중견배우들이 기라성처럼 버티고 있으며 2, 30대의 신인배우와 많은 연수생들이 벽돌 쌓듯이 총망라되어 있다. 바라건대, 앞으로 21세기에는 지금까지의 타율성과 관료체제를 과감히 벗어던지고 자율과 독립과 창조의 예술정신으로 불끈 일어나서 장충동 시대의 연극예술에 아름답고 찬란한 꽃이 만개하기를 기대하여 마지 않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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