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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식의 짧은 글 및 에세이입니다.
노경식희곡집 (전7권) 작가의 말
 
『노경식희곡집』(전7권)을 마무리하며

---- 이로써 작가생활 47년을 결산하여 『희곡집』 전7권을 비로소 마무리한 셈이다. 제1권 「달집」 제2권 「정읍사」 제3권 「하늘만큼 먼나라」 제4권 「징게맹개 너른들」 제5권 「서울가는 길」 제6권「두 영웅」 제7권 「연극놀이」 등 총41편. 여기에는 그동안 써온 라디오드라마, TV드라마, 수필과 기행문 및 잡문류 등은 제외하고 순수 희곡작품에만 한한다. 이들 중에서 5, 6편을 제외하고 나면 모든 작품이 무대공연에 오른 것이니 작가로서는 행운이고 보람이라고 하겠다. 젊은 시절에 출판사 등을 전전하며 생활전선에 시달리면서도 이만큼의 분량을 생산한 것을 상도하면 나 스스로 자랑스럽고 대견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인제는 공자님이 말씀하신 ‘종심소욕 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의 70 고개를 훌쩍 넘어서 팔순(八旬)을 바라보는 나이에 들어섰으니 몇 작품이나 내가 더 생산할 수 있을까? 씨잘 데 없는 헛욕심 부리지 말고 노자님의 ‘상선약수’(上善若水) 가르침대로 감히 살아가고자 한다. 옛날부터 메모하고 생각하고 책장 서랍 속에 넣어뒀던 잡기장도 챙겨보고, 또 요즘같이 상전벽해(桑田碧海)로 하루하루가 깜짝깜짝 다르게 급변하는 세상살이와 소셜미디어(SNS)의 여러 정황도 살펴가면서 다만 두서너 편의 희곡작품이라도 --
앞선 ‘희곡집’에서도 한 말이나 나는 나를 둘러싼 나의 가족과 주위환경 및 모든 이에게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 그지없고, 천상병 시인의 절창처럼 ‘아름다운 이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하고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머리말’을 써주신 임영웅 유민영 선생과 ‘연극놀이’의 책이름을 써준 이근배 시인, 그리고 ‘뒷풀이글’(제6권)의 서연호 교수 및 같은 길을 가는 극작가 윤대성과 언론인 장윤환 두 외우(畏友)에게 모두 감사한다. 또 백성희 장민호 두 분 대배우님과 이태주 남일우 유용환 등의 「우몽산」(友夢傘) 연극동지들에게도 -- 차제에 춘풍추우 4, 50년 세월을 한결같이 정(情) 나누면서 살아온 친구모임을 기록으로 남긴다. 고향 남원의 초중고교 동기동창 「심향회」(心鄕會), 남원을 떠나 서울에서 살고 있는 친구들 「6.3회」(六三會), 경희대 경제학과 58학번의 동창생 모임 「신경회」(新慶會) 등등. ‘6’은 같은 나이로 남원중학교 6회, ‘3’은 남원용성중 3회 졸업생을 가리킨다. ‘신경’이란 이름은 신흥대학교 때 입학(1958)하여 경희대학교(개명) 때 졸업(1962)하였노라는 의미에서, 또한 ‘경’은 우리들이 ‘경제(經濟)과’ 출신이라는 양수겹장의 한글 뜻을 곁들여서 본인이 작명한 것. ㅎ ㅎ ㅎ --
끝으로, 나는 여기에 만감이 교차하고 할말은 많으나 그동안 내 희곡집에 썼던 ‘작가의 말’을 재수록함으로써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임진년(2012) 봄날에 櫓谷, 下井堂 쓰다

◇ 제5권 ‘작가의 말’

『노경식희곡집』5권째를 펴내며

희곡집 제1권 「달집」을 상재한 것이 2004년 6월의 일이다. 때에 나의 요량으로는 한 해에 다섯 권 전부를 한꺼번에 펴낼 계획으로 일을 서둘렀는데, 또 어찌어찌 하다보니 그놈의 타고난 ‘게으름과 느긋함’으로 인하여 때를 놓치고 허송세월 하고 말았다. 해서 인제는 古稀도 넘긴 텃수라 올해엔 작심하고 일을 채근해 봤는데, 상반기에 2, 3 두 권을, 또 하반기는 4, 5권을 펴내게 됨으로써 속마음의 짐을 한껏 털어내고, 나를 아는 세상 사람에게는 부끄러움의 낯골을 펴게 되었다.

희곡집 전5권에 수록된 작품은 모두 28편. 이것은 2004년도까지의 작품 36편 중에서 간추린 숫자로 무대공연에 올라 비교적 평가 받았던 작품들이라고 하겠다.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어디 있으랴. 어느 작품인들 하나하나 귀하지 않은 것이 없으리오만 우선은 이 정도로 선보이고, 다시 훗날에 가서 제6, 제7권을 더 상재하기로 기약한다. 그러니까 나머지 작품들이 아직은 더 책장 속에 있고, 또한 2004년 이후에 발표한 희곡들도 <反民特委>와 <포은 정몽주> <두 영웅> 등등 몇몇이 더 존재한다. 그러고 보니까 작가생활 반백년에 대충 40여 편이 넘는 숫자라면 결코 과작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에다 밥벌이를 위해 외도하듯이 틈틈이 써온 TV극(MBC「전원일기」, ‘특집극’ 등)들과 라디오드라마를 합치자면 작품 편수는 더욱 많고 늘어난다.
여기서 한 말씀 하고 싶다. 참으로 열심히 쓰고, 열심히 술 처묵고, 열심히 놀고, 열심히 살아왔노라고 감히 자부한다. 척박하고 외롭고 힘든 연극과 문학의 길에서 나 스스로도 대견하고 기쁘고 자랑스럽다. 내친 김에 신상에 관한 넋두리 한 마디 더. 家乘에 의하면 우리 집안은 ‘孫’(자손)이 귀하다고 한다. 그럴밖에 없는 것이 할아버지 3형제 중에서 아버지 한 분이 독자(三家獨身)이고, 나 또한 위 아래로 누이 하나도 없이 달랑 2대 독자. 해서 생전의 할머니가 푸념으로 하는 말씀.
“쯧쯧 -- 집안이라고 눈먼 딸자식 하나도 없이 찬바람만 쌩쌩- 돈당깨로!”
온 집안이 돌아볼 것도 없이 적적하고, 나한테는 가까운 친척 하나도 없다. ‘눈먼 딸자식’ 하나가 없으니 ‘고모’라고 불러볼 여자도 모르고 자라났으며, ‘삼촌’과 ‘사촌’, ‘6촌형제’라는 명자 한 개도 없다. 집안이 외롭고 적적하고 공허하고, 온통 찬바람만 돈다. 돌이켜보면 난 어려서(10세) 아버지까지 여의고, 두 과부들(할머니와 어머니) 손에서 서럽게(?) 성장한 셈. 그런데 ‘남의 식구’가 들어오고 나서 딸 하나와 두 아들을 낳아주었다. 얼마나 생광스럽고 기쁜 일인가! 그리하여 시방 요렇게 古稀를 넘기는 나이까지 군소리 한마디 없이 고생하며 곁에서 지켜준 나의 내자가 고맙고, 그 자식새끼들에게는 왠지 미안하고 애잔한 마음이 뭉클 치솟아오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라고 남들처럼 별로 잘해 준 것도 없는데, 나름대로 삐뚤어지지 않고 장성해서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잘 살아가고 지내니까. 그러고 또한 ‘별볼 일 없는 작가’ 노경식을 따뜻이 사랑하고, 서로 믿고 의지하고, 끊임없이 돌봐준 나의 모든 이에게 머리 숙여 감사한다.

나는 성격상 내놓고 큰소리 치는 버릇은 무디나 속마음으로는 “숨은 욕심”이 어지간히 많다. 그러므로 앞으로 힘과 기력이 미치는 한 몇 개 작품을 더 생산하고픈 생각이 굴뚝 같다. 그럴 요량으로 현재 구상중인 소재와 자료도 가지고 있다. 그같은 생각과 과욕(?)이 어느 날 어느 시까지 나한테 허용될 수 있을지, 아니면 다만 품은 생각에만 그치고 말지 모르겠으나, 한갓 가벼운 꿈과 허망과 도로에만 그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어떤 연극인 어른이 하신 교과서 같은 말씀 --
“연극이란 종국적으로 사람과 사람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야. 그 주인공들의 인간 내면과 시대와 역사, 당대의 사회상을 깊이 있게 천착하고, 한없이 아름답고, 따뜻하게 정서적으로 -- 그런데 그게 간단하고 손쉽질 않아서가 문제예요! 허허.”

‘노경식 작품세계’의 논문 게재를 쾌히 허락한 한옥근 교수님, ‘뒷풀이글’을 새로 써준 연극인 벗 구히서님, 사진예술에 요새 푹 빠져 살고 있는 대배우 권성덕님, 또 한 개의 ‘뒷풀이글’을 마련해준 따뜻한 고향친구이자 언론인 한보영님에게 감사한다. 그러고 앞서 첫 권에서도 한 말이지만, 참을성 있게 기다려준 도서출판 연극과인간의 박성복 대표님 및 수고하신 편집 제작진 모두에게 심심한 감사의 마음을 거듭 전하는 바이다.

기축년(2009) 시월 상달에 櫓谷, 下井堂 노경식 쓰다

◇ 제2-4권 ‘작가의 말’

타고난 게으름과 잘못의 부끄러움을 겸하여

2004년 봄에 ‘노경식희곡집’ 제1권 『달집』을 상재한 지 4년을 접고 5년째에 들어섰다. 처음엔 전5권의 다섯 책을 한꺼번에 용기있게 내놓을 요량으로 준비를 서둘렀는데 모든 일이 허사가 되었다. 이런 허사의 귀책사유는 전적으로 본인한테 있다. 내가 뭐- 신중하다거나 겸손해서가 아니고 나의 타고난 게으름과 차일피일 미루는 안이한 성정 때문이다. 도대체 출판사에서 보내 온 작품 교정쇄를 집안에 쌓아만 놓은 채, 먼지 속에서 3, 4년 동안을 허송세월하고 보내 버렸으니 어느 누구를 탓하랴! 참으로 송구스럽고 미안하고 부끄러운 일. 모든 것이 “내 탓이로소이다” 하고, 나를 아끼는 주위의 모든 분들에게 그 허물과 용서를 빈다.

그동안에 나의 연극생활에도 여러 가지 변화가 많았었다. 우선 첫번째로 남북간의 ‘서울평양연극제’(위원장)를 추진한답시고 중국의 베이징과 선양(瀋陽)과 연길 등지를 씨잘데없이(?) 쫓아다니기도 하고, 몇 번의 학술토론회를 개최하는 등등. 겸해서는 아름다운 금강산을 찾아가고, 단둥(丹東)의 푸른 압록강물을 바라보고, 두만강 하류의 ‘防川’과 ‘圖們大橋’, 적적하고 흰눈 덮힌 지척의 북녘 땅 회령 고을을 강 건너서 하염없이 바라보기도 하였으며, 혹은 민족의 성산 백두산 천지를 배관(拜觀)하고는 울컥한 심사에 속절없이 눈물까지 흘려야 했던 일. ----
둘째, 그동안에 난 3편의 신작을 발표할 수 있었다. <反民特委>(극단 미학 공연, 2005)와 <두 영웅 -四溟堂 일본에 들어가다>(국립극단 위촉작품, 2007), <圃隱 鄭夢周>(포항시립연극단 공연, 2008) 등. 그리고 생광스럽게도 제1회 ‘한국희곡문학상 대상’(한국희곡작가협회, 2005)과 ‘서울특별시문화상’(연극, 2006)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셋째는 노경식의 프랑스희곡집 『Un pays aussi lointain que le ciel』이 번역 출간된 일. <하늘만큼 먼나라> <서울 가는 길> <千年의 바람> 등 3편이 한 권에 묶여 나왔는데, <서울 가는 길>(Le Train pour Seoul)은 프랑스연극(극단 Tree of People, Shin Me-Ran 연출)으로 제작되어 대전의 전국연극제(2005) 및 2008년도의 거창국제연극제, 포항국제바다연극제, 마산국제연극제 등에 초청공연되어 좋은 평가를 받았다.
넷째, 2006년 겨울 나는 평소에 소장하고 있던 장서 3천여 권을 내 고향 남원시청에다 기증하고 ‘下井堂文庫’를 명명하였는데, 이를 밑거름으로 해서 그 2년 후에는 새 “남원시립도서관”(2008)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끝으로, 그 사이에 우리 연극계의 큰어른이신 차범석 선생과 원로서예가 설봉 선생(白海天)께서 유명을 달리하셨다. 차 선생님은 불초 이 희곡집에 ‘머리말’을 지어 주셨고, 설봉 선생님은 ‘盧炅植戱曲集’의 한문자를 써주신 어르신들 아닌가! 나의 불민함을 탓하며, 두 어른의 명복을 빌어마지 않는다.
여기에, 제1권 『달집』출간 때의 ‘작가의 말’을 함께 싣는다.

◇ 제1권 ‘작가의 말’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연극예술과 극문학에 몸 담은 지 어언 40여 년 세월! 그동안 나의 어줍짢음과 게으름 탓에 작품집 한 권 변변히 내놓지 못한 주제에, 늦게나마 한꺼번에 5권으로 묶어서 상재하게 되었으니 그 감회가 남다르고 대견스럽고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흥분된다고 하겠다. 지난 해(2003)에 있었던 “노경식연극제”(舞天劇藝術學會 주최, 대구)의 프로그램 책자에서 한 말로써 그 소회의 일단을 피력할까 한다. ‘지금까지 내가 써온 극작품을 헤아려보니, 무대공연에 올려진 희곡만 장· 단막극 모두를 합쳐서 꼭 32편에 이른다.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숫자이다. 이들 가운데서 그래도 “쓸 만한 작품”이 몇이나 되고, 뒷날까지 건질 수 있는 것은 참으로 얼마나 될까? 때로는 사계의 여러분과 관객들에게서 과분한 평가를 받은 물건(?)이 너댓 편은 되는 것도 같은데, 과연 그런 평가들이 먼 훗날까지 이어질 수가 있으며, 또한 우리나라의 연극예술과 극문학 발전에 작은 보탬이라도 될 수 있는 것일까! 나름대로는 열심히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위안도 되나, 오히려 민망함과 부끄러움이 앞선다. 허나 어찌 하랴. 워낙에 생긴 그릇이 작고 생각이 얕으며 大鵬의 뜻이 미치지 못하는 바에야,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걸어가는 수밖에----‘

서울 생활이 올해로 꼭 46년이다. 전라도 “남원 촌놈”이 50년대 말, 아직은 6.25전쟁의 상흔과 혼란이 채 가시지 않은 암담한 시절에 청운의 뜻을 품고 서울 도회지에 올라와서 대학에 들어가고, 그것도 문학예술과는 아예 거리가 먼 경제학과에 입학했다가 어찌어찌 졸업이라고 하고는 그냥 낙향해서 3년간의 하릴없는 룸펜생활, 그러다가 또 시골 구석에서 우연찮게 신문광고 하나를 보고는 다시금 뛰쳐올라와 가지고 무작정 남산의 드라마센타 연극아카데미 극작반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 오늘날 노경식의 ‘My Way’이자 촌놈 한평생의 팔자소관(?)이 된 것. 누군가 나에게 경제학을 전공하고 어쩌다가 작가가 되었소 하고 물을라치면, ‘글쎄요, 그냥 “나일론 뽕“이죠, 머.’ 하고 멋적게 웃곤 한다. 연극평론가 한상철 교수가 <노경식 論>에서 적절히 말씀했듯이, ‘노경식이 극작가가 된 동기는 별로 이렇다할 만한 것이 없다.’ 나의 성장기인 어린 시절 고향집은 읍내의 한가운데쯤에 있었다. 즉 남원읍의 가장 번화한 곳으로 잡화상 가게와 음식점들, 중국집, 그러고 하나밖에 없는 문화시설 ”南原劇場“도 그곳에 있었고, 몇 걸음만 더 걸어가면 읍내의 시끌벅쩍한 장바닥(시장통)과 <춘향전>으로 유명한 그 ”廣寒樓“ 옛건물도 바로 지척에 있었다. 일 년에 한두 차례 포장막으로 울긋불긋 둘러치고 밤바람에 펄럭이는 가설무대로 온고을 사람들을 달뜨게 하는 곡마단(써어커스) 구경을 빼고 나면, 남원극장에서 틀어주는 ‘활동사진’(영화)과 ‘딴따라’ 악극단 공연만이 유일한 볼거리요 신나는 오락물이다. 그러고 매년 四月초파일의 부처님 오신 날에 개최되는 ‘남원춘향제‘ 때면 天才歌人 임방울과 김소희 선생 등을 비롯해서 전국에서 몰려드는 내노라 하는 판소리 명창과 난장판의 오만가지 행색 및 잡것들. 신파 악극단의 트럼펫 나팔소리가 <비 내리는 고모령>이나, 또는 ‘울려고 내가 왔던가 웃으려고 왔던가/ 비린내 나는 부둣가에 이슬 맺은 백일홍--’ 하고 애절하게 울려퍼지면 어른 아이, 여자와 젊은이 늙은이 할 것 없이 달뜨지 않은 이가 뉘 있었으랴! 해서 나는 연극이니 영화니 판소리 춘향전이니 하는 ‘딴따라’를 접할 기회가 다른 동무들에 비해 많았다고 하겠다. 그런 것들이 아마도 철부지 어린 노경식과 위대한 극예술(?)과의 첫만남이었으며, 또한 알게 모르게 내 피와 영혼 속에 어떤 하나의 接神의 경지가 마련된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자문자답해 본다. 그래서 그런지 국민(초등)학교 5, 6학년 무렵에는 학예회 같은 때에 여학생들이 하는 율동(춤)과 동요 등 노래패보다는 우린 당당하게(?) ”연극“ 한 편을 직접 쓰고 만들어서 그 시절(전쟁 때)의 부상당한 상이군경을 위하여 위문공연도 하고, 나는 그럴 때마다 언제든지 여자 역할(어머니 역)을 맡기도 했었으니까. --

그렇게 언저리에서나 맴돌고 무심 덤덤한 나이기에, 오늘의 노경식이가 있기까지 크나큰 優渥과 기회를 베풀어 주신 어른들의 함자를 황송스런 마음으로 여기에 명기하지 않을 수 없다. 경희대학교 경제학과 학창 때의 국문과 교수이신 소설가 황순원 선생님, 남산 드라마센타 시절의 동랑 유치진과 연출가 이원경 선생님, 한국극작워크숍의 여석기 선생님 및 박조열 윤대성 윤조병 이재현 등 동료작가이자 박영희 무세중 등 동인들, 그리고 연극세계에 정작 발 들여놓고 나서는 이해랑 차범석 두 분 선생님과 권오일 강유정 박용기 임영웅 한상철 김동훈 등등의 여러 면면들---- 나는 또한 가족들 얘기도 좀 털어놓아야겠다. 내가 열한 살 때 아버지가 세상 떠나고 혼자서 집안살림을 꾸려가신 나의 억척스런 할머니와, 겨우 서른한 살의 젊은 나이에 과수의 몸으로 ‘거무(미) 같은 새끼’ 하나(2대독자)를 의지하고 서럽게 살아오신 어머니. 그러고 별볼 일 없는 나한테 시집와서 3남매(석헌 석지 석채)를 낳아서 길러주고, 지금껏 구차한 살림살이를 군말 없이 잘 지탱해 준 아내도 참으로 예쁘고 고마울 뿐이다.

끝으로 ‘盧炅植戱曲集’의 한문자를 써주신 원로서예가 설봉 백해천 선생님과, 책의 귀한 표지그림을 흔연스럽게 내준 서울대 미대 교수이자 나의 동향 후배인 단아 김병종 화백에게 특히 감사드리는 바이다. 그리고 힘든 출판여건 속에서도 책의 출간을 선선히 응낙하신 연극과인간사의 대표 박성복 사장님 및 편집부의 이은숙 대리와 관계자 여러분에게 심심한 사의를 거듭 표하고, 출판지원금의 혜택을 준 한국문예진흥원에도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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