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리탕" 한 첩 드시오소서 |
칼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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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연극] 1998년 10월호 "時論"--
“난리탕” 한 첩 드시오소서
지금부터 4백여 전의 일이다. 미증유의 ‘임진국난’을 당하여 선조임금 일행이 대궐과 성중 백성을 헌 신발짝 버리듯이하고 창황망조 피란 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해 4월 그믐께의 칠흙같이 어두운 밤에 억수로 퍼붓는 찬비를 맞아가며 궁성을 벗어나고, 서북쪽으로 개성과 평양을 바라보며 정처없는 몽진 길에 올랐으니, 그 행렬의 가련함과 서글픈 신세를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는 일. 때에 임금의 병을 돌보는 어의 양예수가 말 한 필도 얻어 타지 못한 채 도보로 걸어서 호종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는 갑자기 꾀병을 부리기 시작했다. 두 다리에 동티가 나서 아프다고 엄살 떨면서 슬슬 뒷꽁무니 빼고 도망치고자 수작을 부리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도승지 이항복이가 가만히 뒤돌아보고 하는 말이, “여보시오, 어의님. 의원 당신의 그 다리병말씀요? 그건 내가 처방전을 하리다. 보아 하니 당신님은 그 ‘난리탕’ 한 첩이면 씻은 듯이 거뜬하겠구료. 하하하--- ” 나라 안에 나리가 일어났으니 “난리탕”이라도 한 대접 마시라는 우스갯소리였다. 그래서 다른 대신들도 크게 따라 웃고, 결국은 임금님도 그 소리를 듣고는 어의 양예수에게 말 한 필을 주어서 올라타도록 했던 것이다. 나라와 백성이 풍전등화의 그 참혹함 속에서도, 유모어를 잃지 않고 멋을 부릴 줄 아는 30대의 젊은 신하 백사 이항복의 빼어난 기지와, 그 넉넉한 도량과 여유가 기다려지는 때이다. 이른바 6.25 이후의 “제2의 국난”이라는 IMF사태를 당하여, 작금의 화두는 시장경제와 구조조정 등등 경제논리가 판을 치고 있다. 물론 나라의 경제위기를 시장경제 논리로 풀어야 한다는 그 충정을 모르는 바 아니나, 그렇다고 순수 문화예술 분야까지 모든 것을 경제 잣대로 해결하려는 어리석음과 성급함을 보여서는 아니된다. 상품 생산이란 것이 그 편리하고 정밀한 우수제품의 경제성에 있다고 한다면, 문화예술이란 또한 본질적으로 그 아름다움과 인생의 진실과 삶의 기쁨을 추구하는 예술성에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고비용 저효률의 경제잣대를 가지고 마치 조자룡이가 헌칼 쓰듯이 마구잡이로 재단해서는 안된다. 물론 그동안에 있어 왔던 고질적인 관료주의 행태와 예술의 비전문성을 비롯해서 행사 위주의 일회성 잔치, 예술투자보다는 자기네 밥그릇 챙기기, 예술기금의 자의적 집행과 불투명성, 기관 운영의 방만함과 비능률성 등등 온갖 예술외적인 모순과 적폐 및 불합리를 덮어두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잘못된 거품은 거품대로 과감하게 거둬내 버리고, 또한 예술작업은 그것대로 예술의 본질과 논리를 따라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순수 공연예술정책을 투명하게 공론화하자. 둘째로, 연극 무용 음악 등 순수공연예술은 배 불리 먹고남은 뒤에나 돌아보는 시혜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들 모든 이의 책무이자, ‘당위적’인 문제인 것이다. 세종임금의 찬란한 문화창달이 그러하고,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엘리자베드 왕조 시절의 셰익스피어가 그 역사적인 사례라 할 것이다. 흔히들 과학기술 입국의 진흥이 수학 과 문리 화학 등 기초학문에 뿌리를 두는 것이라면, 융성한 문예진흥의 뿌리는 그 순수한 기초공연예술에 있으며, 마땅히 보호받고 육성되어야 할 절박한 분야이다. 더구나 내일 모레 다가오는 21세기는 정보화와 문화상품의 고부가가치를 생산해 내는 세상일 것이라고 말끝마다 큰소리 치는 이때에 더 이상의 췌언이 필요할 것인가. 오늘날의 이 냉혹하고도 서글픈 “제2의 국난” 속일망정, 그래도 우리는 명신 이항복이의 그 기지와 멋과 유모어를 배우고자 한다. 그리하여 박찬호와 박세리와 선동열을 보면서 우리가 시름과 한숨을 달래고 용기와 힘을 얻을 수 있듯이, 일반서민과 더불어 <명성황후>의 객석 자리에 앉아 있는 우리네 대통령, 음악회장으로 들어가는 멋쟁이 국무총리, 그리고 운동경기장에서 흉허물없이 함께 박수치고 다 같이 함성을 질러대는 국회의원과 소탈한 장차관 등등 이른바 사회지도급 인사들을 우리는 심심찮게 만나보고 싶다. 문화예술을 모르거나, 아예 외면하고 각박하게 딴생각만 하는 이들이여, “난리탕이라도 한 첩 잘 섞어서 들어보시지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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