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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식의 역사극 과 역사인식 서연호
 
'뒷풀이글' - 노경식희곡집 제6권

노경식의 역사극 <두 영웅>과 역사인식

서 연 호 (연극평론가, 고려대학 명예교수)

1.
근래 우리 주변에서 텔레비전 사극에 대한 시비는 사회적 쟁점의 하나이다. 쟁점의 하나는 ‘창작의 자유’라는 입장에서 사극은 역사적 사실에 구애하지 않고 작가적 상상력을 마음대로 펼칠 수 있다는 것이다. 쟁점의 다른 하나는 ‘역사의 해석’이라는 입장에서 사극은 역사적 사실을 가능한 왜곡(歪曲)하지 않는 범위에서 작가적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시비에도 불구하고 방송국들은 전자의 입장에서 사극을 제작하는 일을 좀처럼 멈출 줄 모르고 있으며, 따라서 평행선을 달려온 시비는 상당 기간에 걸쳐 시비 그대로 지속될 공산이 높다.
일본에서는 시대극 또는 시대물(時代物)이라는 말이 자주 사용된다. 이것은 17세기 초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가부키(歌舞伎)의 한 부류를 말한다. 어느 한 시대를 배경으로 주인공인 무사(武士)가 정의를 위해 활약하는 영웅담을 그린 연극이다. 사실의 왜곡이 심한 연극이다. 무사사회이던 일본에서는 이 시대극이 현재까지 대중적 인기를 유지하고 있다. 18세기 중엽부터 새로운 가부키인 세화물(世話物)이 등장했다. 서민들의 갈등과 세태를 그린 이 연극은 무대적 사실주의를 성장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현재 일본에서 그러하듯, 한국에서도 시대극을 역사극과 동일한 개념으로 오인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셰익스피어의 사극으로부터 역사극(歷史劇)이라는 양식이 분명한 모습을 드러냈다. 즉 역사와 역사극, 역사가와 극작가의 역할이 분명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역사는 현재를 기준으로 한 과거 사실의 새로운 해석적 서술이고, 해석가(解釋家)라는 관점에서 역사가는 인문과학적 작가에 해당한다. 서구에서 역사서(歷史書)를 하나의 작품에 비유하는 것은 해석의 독자성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역사극은 현재의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과거 사실을 재창조한 문예작품이다. 역사가의 독자성이 존중되듯이, 새로운 역사적 비전의 제시라는 측면에서 극작가의 독창성도 존중된다.
셰익스피어(1564-1616)는 노르만계의 영국왕인 존(1199-1216), 리처드 2세(1377-99), 헨리 4세(1399-1413), 헨리 5세(1413-22), 헨리 6세(1422-71), 리처드 3세(1483-85), 헨리 8세(1509-47)를 주인공으로 세우고, 그들의 시대를 배경으로 각각 새로운 역사극을 창조했다. 자신이 살았던 생애보다 멀게는 4백 년, 가깝게는 70년 이전의 과거를 대상으로,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초반에 걸친, 자신의 생애와 동시대를 기준으로 작품들을 차례로 발표한 것이다. 이 작품들이 바로 <King John>(1591년작), <Richard Ⅱ>(1595년작), <Henry Ⅳ>(제1부 1598, 제2부 1600년작), <Henry Ⅴ>(1598-1599년작), <Henry Ⅵ>(3부작 1591-2년작), <Richard Ⅲ>(1592-3년작), <Henry Ⅷ>(1613년작) 등이다. 역사적 비전의 제시와 인간의 본질적 탐구, 탁월한 연극적 형상화라는 측면에서 그의 역사극은 여러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날까지 높이 평가되고 있다.
여기서 다시 첫 번째 쟁점으로 돌아가 재론할 필요를 느낀다. 개인적 삶은 역사라고 부르지 않는다. 역사는 집단적이고 사회적인 삶의 과거를 대상으로, 그 삶의 현재성과 미래적 연속성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역사극 또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작가적 인식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일반 드라마와 구분된다. 일반 드라마의 특성에 더하여 역사적 책임과 비전이라는 역할이 더 첨가되어야 하는 양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창작의 자유는 보장되지만, ‘역사적 사실에 구애를 받지 앓고 작가적 상상력을 마음대로 펼칠 수 있다’는 방종적(放縱的) 사고는 분명 그릇되고 비뚤어진 것이다.
역사극을 역사로 생각하고 믿는 많은 사람들, 특히 청소년들은 역사극을 그대로 역사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사례가 다반사이다. 그러므로 역사적 사실을 무시하고 역사적 상상력을 우선시하는 작가의 태도는 무책임을 넘어 진실을 왜곡한 범죄행위에 가담하게 될 여지가 많다. 이 경우 창작의 자유는 방종으로 얼룩지게 된다. 아울러 왜곡된 사실을 역사로 위장하는 방송국의 행위 역시 사회적 범죄에 동조한다는 비판을 모면할 길이 없게 된다. 특히 공영방송인 KBS가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 정책을 비판하는 ‘이른바 사극 드라마’를 제작하면서 스스로 비사실적이거나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확대 과장하는 것은 자기모순, 자가당착이 아닐 수 없다. 시대극처럼 역사적 소재는 대중의 기호물(嗜好物)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역사극이 시대극으로 동일시되고, 나아가서 상업주의와 결탁하고 나면 사회적 정의와 윤리를 망치는 무서운 무기로 전락된다는 점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2.
노경식의 <두 영웅>(2007년작)은 조선의 사명당 유정(惟政 1544-1610, 松雲)과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그린 역사극이다. 불교계에서 유정은 선승으로 유명하다. 속세에서 유정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승병대장으로서 큰 전과를 올렸고, 특히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적진에 네 차례나 찾아가 세 번 회담하고, 왜군 침공의 부당성을 설파하고 무리한 요구를 물리친 공로는 높이 평가되고 있다. 유정은 1604년 8월에 대일강화사신의 사명을 띄고 도일하여 8개월 간 그곳에 머무르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설득하여 수많은 포로 동포들과 함께 귀국하는 대업을 이루었다.
유정과 동시대를 살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2-1616)는 미카와(三河)의 다이묘(大名) 집안에서 태어나 스루가(駿河)의 다이묘 이마가와 씨(今川氏)의 인질로서 젊은 시절을 보냈고, 차차 세력을 규합한 그는 1561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와 동맹을 맺어 새로운 지도자로 부상했다. 평소 갈등하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와 화해하고, 1590년에 간토(關東)로 옮겨 250만 석의 다이묘가 되었다. 히데요시 사후에는 그의 유언을 청취한 고다이로(五大老)임에도 불구하고, 동군(東軍)의 대표가 되어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秀賴)의 서군(西軍)과 대결했다. 1600년에 세키가하라(關ケ原) 전투에서 승리했으며, 1603년에 쇼군(將軍)이 올라 에도막부(江戶幕府)를 열었다. 1614년의 겨울전투, 이듬해의 여름전투에서 승리해 도요토미 가문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도쿠가와 정권 265년의 기초를 굳건히 다져 놓은 뒤에 눈을 감았다.
<두 영웅>의 무대는 일본이 중심이고, 1604년 8월에 조선에서 탐적사(探敵使)로 파견된 유정이 그곳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말 그대로 적진을 정탐하는 역할과 함께 두 차례의 왜란에 잡혀간 많은 동포들을 귀국시키기 위한 협상의 사명을 띈, 길고도 긴 여정이었다. 8월 20일에 조선을 떠난 그는 이듬해 4월 15일에야 귀국했다. 대업을 이루는 데는 무려 8개월이 소요되었다. 이 작품은 표제가 암시하는 대로, 양국의 두 영웅을 대결시키는 것이 주제이지만, 실제로는 두 사람만이 아니라 양국 7년전쟁의 생생한 상황을 배경에 두고, 때로는 전쟁 당시를 재현하면서 전개된다. 그러므로 두 사람을 통해서 사실적으로, 통시적으로 점검(點檢)되는 과거와 현재의 한일역사라고 할 수 있다.
작가의 역사인식은 몇 단계의 프리즘을 관통하고 있다. 먼저 21세기 오늘날의 한일관계 위에서 시점(視點)이 출발한다. 한국측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탄압을 인정하지 않는 역사교과서 문제, 점령한 섬을 자기네 영토라고 주장하는 독도 문제, 조선인의 유골을 되돌려 주지 않는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 문제, 조선 여성을 유린한 종군위안부 문제, 일본에서 노동한 임금을 제대로 되돌려주지 않는 조선인에 대한 급료체불(給料滯拂) 문제 등, 여러 가지 식민지배의 ‘잔재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그들과 여전히 갈등하고 있다. 1965년부터 국교가 정상화되었다고 하지만 46년이 지난 현재에도 식민잔재의 청산은 요원하게 전망된다.
둘째 단계는 1604년의 현실에서 유정이 바라본 시점이다. 1598년 11월 하순에 7년간의 전투는 끝났고, 이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사(病死)를 맞은 일본군은 남해안을 몰래 빠져 도주했다. 이순신 장군이 장렬하게 전사하는 막판에 유정은 순천에서 일본군의 퇴각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전쟁이 끝난 지 6년이 지났지만 물질적 피해는 복구의 길이 멀었고, 설상가상으로 조선인들이 입은 정신적 심리적 상처는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었다. 너무 처절하고 아프고 괴로운 상처였다. 이런 상황에서 유정은 승려의 신분으로 ‘상처의 치유와 해결’에 목숨을 걸고 솔선해 나선 것이다.
세째 단계는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침략을 일으킨 시점이다. 이 시점은 유정과 도쿠가와 이에야스, 유정과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1562-1611)가 대담을 하는 과정에서 회고(回顧)하는 형식으로 제시된다. 도요토미는 여러 가지 유리한 조건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일본을 통일했다. 권력과 군력(軍力)이면 무엇이든 못할 일이 없다는 망상으로 조선을 침략하고 궁극에는 중국을 점령하려는 야망을 품었다. 그러나 그는 조선전쟁에서 얻은 것이 없었으며, 자신마저 전쟁 중에 사망했고, 사후에는 아들(히데요리)에게 계승된 최고의 권좌(權座)마저 잃고 말았다. 이런 시점을 통해 무모한 전쟁의 피해와 상실을 일깨우고 있다.
네째 단계는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 1358-1408)가 조선국(朝鮮國)과 교린(交隣)한 시점이다. 그는 무로마치막부(室町幕府)의 제3대 장군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고대 일본의 문화발전에는 한반도의 영향력이 매우 컸다. 막부정권이 수립된 이후에 교류가 단절되었는데, 요시미쓰 시대인 1404년에 승려 슈토(周棠)가 화협사(和協使) 역할을 했다. 조선시대 초기부터 양국 사이에는 그런 대로 160여 년의 평화가 이어졌다. 작가는 양국의 평화를 깨뜨린 인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지목했다. 유정은 요시미쓰의 교린정책을 일본인들에게 상기, 강조시킴으로써 간접적으로 도쿠가와막부(德川幕府)의 대조선 화협정책을 권유했던 것이다.

3.
이 작품에는 두 영웅시대의 한일관계가 송두리째 나타나 있다. 또한 두 영웅의 기지와 익살에 넘치는 대사를 통해 지도자로서의 속내와 국가적인 입장을 넌지시 표현한 것이 장점이다. 표면적인 내용은 유정의 일본방문 및 협상기록이고, 이면적인 내용은 양국인들이 회상하는 과거사의 문제들이다. 플래시 백의 장면이 자주 삽입되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유정은 부산 다대포를 출발해 현해탄을 건너 교토의 후시미성에 도착한다. 왜란에 순국한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의 애첩을 찾기 위해 밤거리에 나섰다가 살해의 위협을 받고, 후시미성으로 돌아와 경호문제에 항의한다. 일본측이 정해준 임제종(臨濟宗)의 혼포지(本法寺)에서 7개월간이나 거처하면서 고우쇼지(興聖寺) 절의 주지 원이선사(圓耳禪師)를 제자로 삼는다. 후시미성에서 과거사를 논의하고, 도쿠가와막부의 사열식을 관람한다. 이 사열식은 조선측에 무력을 과시하며 위협하려는 행사이다. 두 영웅이 본격적으로 대좌해 소기의 협상이 이루어진다(제8장, 제10장). 일본의 주자학을 일으킨 조선의 강항(姜沆) 선생과 그 일본 제자인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 하야시 라잔(林羅山 1583-1657)의 면모도 알려진다(제9장).
귀국하는 길에 후지산, 비와호, 오사카성, 하카타, 구마모토성(熊本城), 나고야성(名護屋城), 고우타쿠지(廣澤寺), 이즈하라를 거쳐 부산으로 돌아온다. 구마모토성에서 가토 기요마사와 재회하고, 그의 안내로 왜란의 출진지(出陣地)였던 사가현(佐賀縣) 나고야성(일본 중부의 나고야, 名古屋와는 다른 지역)의 내부를 시찰한다(제12장, 제13장). 고우타쿠지에서는 승려가 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애첩 히로사와(廣澤)를 알게 되고, 왜란에 끌려간 도공 심당길(沈堂吉)과 감격적으로 만난다(제14장). 두 영웅은 시종 동양 전체를 관망하며, 송학야계(松鶴野鷄)의 기질, 난형난제(難兄難弟)의 품격 있는 마음씨, 용호상박(龍虎相搏)의 지도자적인 리더쉽을 지닌 채, 협상을 이끌어 성사시킨다.
이렇게 역사적인 상황이 전개되는 가운데 한일간에 얽힌 역사적인 사실들이 회상으로 부각된다. 이종무(李從茂)의 대마도정벌과 몽고군의 일본원정에서 협력자 역할을 한, 일본의 조선에 대한 원한과 보복심리가 묘사된다. 아시카가 요시미쓰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관(觀)을 통해 일본외교의 차이를 부각시킨다. 귀무덤(耳塚)과 코무덤(鼻塚), 왕자의 포획과 왕릉의 파괴, 이순신의 해전과 송상현의 동래성전투, 심당길을 비롯한 도공들의 납치 연행 이야기 등을 통해서 왜란의 실상이 재연된다.
<두 영웅>은 시적인 문체와 일상적인 대화체가 조화되고, 한일간의 7년전쟁을 총체적으로 부각시켰으며, 두 영웅의 인간관과 국가관을 통해 역사적인 현실과 미래를 투시한 점에서 문제작이라 할 수 있다. 한일관계를 이처럼 사실적으로 첨예하게 취급한 희곡작품으로는 최초의 업적이라 할 만하다. 4백 매가 넘는 총 16장의 방대한 분량에 비해 두 영웅의 대좌가 부족한 듯이 보이는 것은 극적인 성격창조라는 관점에서 일말의 아쉬움으로 남는다. (20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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